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권세가였던 우의정 정순붕의 장남으로, 학문과 도가에 능통하여 김시습, 서경덕과 함께 조선 3대 기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이 때문에 '정북창'이라고도 많이 불렸다.2. 생애
한무외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과 임방의 「천예록」에서는 정렴이 배우지도 않고서도 외국어를 구사하였으며, 새소리와 짐승 소리도 알아들었고, 백리 밖의 일을 알았으며, 신선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도가의 기술은 그의 능력에 기반하는데, 정렴은 실제 젊어서부터 의술에 뛰어났다. 중종을 뒤이어 보위에 오른 인종이 병석에 있을 때, 정렴이 들어가 진맥을 하고 처방하였으며(「인종실록」 권2 참조), 임금의 진찰을 전담하는 어의도 치료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38세의 정렴이 약방문에 참여하도록 천거받았다(「중종실록」 권 105 참조). 한편, 그 동생 정작도 큰 형을 따라다니며 영향을 받아, 허준(許浚)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할 때 ‘유의(儒醫, 선비로써 의술을 아는 학자)’로써 참여하여 「동의보감」 편찬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정렴은 설화 속에도 이인으로 등장한다. 정렴은 아래로 동생이 4명이 있는데, 유독 넷째 동생 정담(鄭䃫)의 부인인 구씨 부인을 귀하게 대접하였다. 친척들이 그 이유를 묻자, 정렴은 온양 정씨의 후손들은 모두 넷째 제수씨인 구씨 부인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넷째 제수씨 친정인 능성 구씨의 묘자리를 잡아주며 가문에 훌륭한 후손이 많아 가문이 잘 될 것이라 하였다. 그 후 정렴의 가문은 화를 만나[1] 후사가 없었는데, 구씨 부인의 아들로 양자를 각각 보내 대를 이을 수 있게 되었고, 능성구씨 집안은 구사맹 등 훌륭한 인물들이 나와 집안이 번창하였다. 영조의 막내 딸 화길옹주도 이 집안의 구민화에게 시집갔다. 정렴이 잡아준 묘자리는 군장리(群場里, 현재 남양주 금곡동)의 구희경(具希璟)의 묘이다.(구수훈(具樹勳), 「이순록(二旬錄)」 참조)
또한, 임방의 천예록에서는 마찬가지로 이인으로 불렸던 전우치가 조선 땅에 세 신선이 계신데 장도령[2]이 제일이고, 그 다음이 정렴이며, 그 다음은 윤세평이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천예록에서는 그가 중국에 아버지 정순붕을 따라 사신으로 갔을 때 남만의 여러 이민족 사신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어 해당 사신들은 물론 조선인들과 중국인들도 전부 놀랐고, 고모와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 고모가 영남에 보낸 종이 조령을 넘다가 양반에게 무례하게 굴어서 짚신으로 뺨을 맞은 이야기를 천리 밖에서 내다보는 등 천리안 능력도 지녔다고 서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