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田民辨整都監고려 후기 권세가에게 점탈된 토지·농민을 되찾기 위해 설치한 임시 기구.[1]
2. 역사
1269년(원종 10)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이때는 김준의 전민(田民)을 임연, 임유무 부자가 차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 그 뒤 1288·1301(충렬왕 27)에 환관 최세연과 그 무리들이 소유한 전민을 몰수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 1318(충숙왕 5)년에 권문세족의 불법 점탈 전민을 본주인에게 돌려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로 처음 설치되었으나 한 달 뒤 찰리변위도감(拶理辨違都監)으로 개명되었다. 그리고 1321년에 拶 자를 察로 고쳐 재설치되었다.공민왕 대에 전민변정도감으로 개명되고, 1352(공민왕 1)·1366, 1381(우왕 7)·1388년에 설치되었다. 공민왕 이전에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유명무실화되었으나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하여 파격적으로 개혁 조치를 하고 나서야 그 임무를 완수하고 폐지될 수 있었다.
전민변정도감의 이러한 잦은 교체 및 치폐는 심왕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충선왕은 고려 왕위로 충숙왕을 임명하고 심왕 자리에는 양자인 왕고를 앉혔는데, 왕고는 충숙왕이랑 정책 문제를 두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충숙왕은 어떻게 해서라도 몽골 손아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지만 심왕 왕고와 그의 지지 세력인 권문세족에게는 어림없는 소리).
더욱이 충선왕은 상왕으로 물러나고서도 자기가 만든 만권당이랑 대도에서 원나라 학자들과 술 먹고 지내면서 충숙왕에게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니 충숙왕 입장에선 몹시 껄끄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려 조정 내에서는 왕이 떡하니 살아있는데도 심왕을 지지하는 심왕당(瀋王黨)과 충숙왕을 지지하는 신왕당(新王黨)이 공존하고 있어 서로 견제하고 비판하다 보니 당시 고려 조정은 개판 5분 전이었다.
3. 내용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들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노비안검법을 부활시켜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양민으로 풀어주기 위해 설치되었다.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수차례 설치와 폐지가 반복되었다.전민변정도감은 조선 시대에도 유학자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당대에는 많은 저항에 부딪혔는데 그 이유는 신진사대부와의 마찰도 있다. 신진사대부는 대부분 지방 향리의 후손으로 지방에 많지는 않지만 세력 기반을 갖출 정도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신돈이 처음 개혁을 할 때 이들은 환영했으나 신돈의 칼끝이 자신들을 향하자 경악하며 저항하였고 신진사대부의 저항을 느낀 공민왕이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보고 불만까지 한 번에 없애기 위해 신돈을 처형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2]
[1] -도감'이 임시 기구를 뜻한다.[2] 단, 한 가지 오해해선 안 되는 게 개혁으로 인한 불만과는 별개로 신돈이 권력의 단맛을 보자 점차 타락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