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학순(張學順) |
생몰 | 1887년 11월 24일 ~ 1952년 5월 4일 |
출생지 |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차산리 |
사망지 | 경상남도 남해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학순은 1887년 11월 24일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차산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2일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 사는 이예모(李禮模)가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접수한 뒤 귀향하여 그와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尹柱舜) 등과 만나 4월 3일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들은 인근 동리에 이 계획을 알렸고, 4월 3일 오후 3시경 남양리 노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남해읍을 향해 행진했다.시위대가 고현면에 이르렀을 때, 면장 김치관(金致寬)이 많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이 사실을 경찰주재소에 밀고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면장이 밀고한 사실을 안 군중은 내일 남해읍 장날 때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했다. 4월 4일 아침 일찍 일어난 장학순은 장꾼으로 가장하고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군이 천여 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들은 군청, 우체국, 학교, 주재소에 들어가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강요하고, 경찰 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김치관은 주재소 경찰들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자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해 사천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했다. 군중은 이 사실을 모른 채 날이 저물자 자진 해산하려 했다가 뒤늦게 김치관의 행위를 전해듣고 고현면 이어리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뒤 해산했다. 이후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검속이 실시되었고, 장학순은 체포되었다. 그는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1년 3월 출옥 후 남해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2년 5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장학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