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조니 토리오 Johnny Torrio | |
출생명 | 도나토 토리오 Donato Torrio |
영어명 | 존 "조니" 토리오 John "Johnny" Torrio |
출생 | 1882년 1월 20일 |
이탈리아 왕국 몬테펠로소 바질리카타 | |
사망 | 1957년 4월 16일 (향년 75세) |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 |
국적 | 이탈리아 왕국 → 미국 |
직업 | 마피아 |
신체 | 166cm |
배우자 | 애너 시어도셔 제이컵즈 토리오 Anna Theodosia Jacobs Torrio (1912년 ~ 195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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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금주법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마피아 중 한 명.시카고 아웃핏의 2대 두목(Boss)으로, 교묘한 수완이 명성을 얻어 여우(The Fox)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 생애
1882년 1월 20일 이탈리아 남부에서 태어났다. 도나토라는 이름은 할아버지에게서 따온 것이다. 철도 일을 하던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사망한 직후인 1884년 12월 어머니가 토리오를 데리고 뉴욕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 제임스 스트리트로 건너왔다. 당시 토리오는 2살이었는데 미국스럽게 들리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느낀 어머니에 의해 존으로 개명되었다.이후 어머니는 재혼. 십대에 동네 친구 로버트 바넬라[1]와 길거리 갱단에 들어가 우두머리가 되었다. 갱단이 운영하는 당구장을 열어 도박과 불법 대출을 시작하였고, 사설 마권, 아편 밀수, 매춘 등으로 모은 자금으로 불법 복권을 운영하였다.
토리오의 이름은 당시 악명 높았던 파이브 포인츠 갱의 귀에 들어갔고 파이브 포인츠 갱의 보스인 폴 켈리가 그를 눈여겨 보았다. 토리오는 결국 파이브 포인츠 갱에 입단했는데, 토리오는 켈리를 상당히 존경 했다고 한다. 토리오는 역시 여러 갱단들을 거쳐 파이브 포인츠 갱으로 옮겨왔던 앨 커폰을 동료 프랭키 예일의 소유인 브루클린 코니 아일런드의 술집 하버드 인[2]의 바텐더로 고용했는데, 커폰은 당시 켈리의 술집에서 일하던 토리오의 모습에서 감명을 받고 그를 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2.1. 빈첸조 콜로시모 암살
토리오는 당시 시카고에서 100여개 이상의 매춘업소를 운영하던 시카고 아웃핏의 두목(Boss) 빈첸조 콜로시모의 아내인 빅토리어 머레스커우의 조카였는데, 1909년 콜로시모가 토리오에게 블랙 핸드의 갈취를 처리해달라고 의뢰해 시카고로 가게 된다. 당시 시카고를 지배하던 블랙 핸드는 콜로시모에게 한 번에 많게는 5만 달러까지 요구하곤 했다. 토리오는 살해와 협박으로 이 갈취범들의 권역을 지워나갔고, 이후 그대로 시카고에 머물며 콜로시모의 조직을 운영하고 폭력배들을 동원해 다른 갱단들의 위협을 해결했다.1920년에 드디어 금주법이 시행되는데, 토리오는 밀주가 엄청난 시장이 될것을 눈치채고 콜로시모에게 밀주 사업을 추천했다. 그러나 콜로시모는 밀주 사업을 시작하면 경찰과 경쟁자들의 주목을 받을까 염려해 이를 거절한다.
그해 3월 콜로시모는 토리오의 이모 빅토리어와 이혼이 성립되자마자 바로 4월에 오페라 가수 데일 윈터와 재혼을 한다. 밀주 사업을 고집스럽게 승인하지 않는 콜로시모를 성가신 방해꾼으로 여겨온 토리오는 당대 시카고의 거물급 마피아들의 인가를 받은 후에 절친 프랭키 예일을 시카고로 소환하며 콜로시모를 죽여줄 것을 부탁한다.
5월 11일 토리오는 전화로 콜로시모를 한 카페로 불러냈고 그곳에서 콜로시모는 사망한다. 프랭키 예일 무리는 물론 이혼 위자료에 불만을 표한 적이 있는 콜로시모의 전아내 빅토리어 등도 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 되었으나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는다. 토리오는 죽은 콜로시모의 거대한 조직을 차지하게 된다.
이즈음 토리오는 커폰을 시카고로 불러 콜로시모의 조직이 운영하던 매춘업소의 어깨로 고용했다. 토리오와 그의 오른팔이 된 커폰은 도박, 매춘, 밀주 등으로 1920년대에 조직을 시카고 내 제1의 세력으로 키워냈다.
2.2. 노스 사이드 갱과의 전쟁
1924년 다인종 갱단 노스 사이드 갱을 이끌던 아일랜드 마피아 딘 오배니언[3]은 토리오와 사이가 가깝던 시칠리아 출신 제나[4] 형제가 자신들의 구역에서 밀주를 판매하는 걸 발견하고 토리오를 찾아가 이를 막아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토리오는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이에 오배니언은 제나 형제의 밀주를 강탈한다. 제나 형제는 바로 오배니언을 살해하려 했다. 그러나 시칠리아 출신들의 전미 공제조합으로 위장한 채 활동하던 마피아 조직 시칠리아 연합[5]의 시카고 지부장 마이크 멀로[6]는 유혈사태를 원치 않았고, 이를 불허했다.
2월, 노스 사이드 갱의 청부살인업자 존 더피[7]가 당시 커폰이 관리하던 토리오 산하의 술집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시체로 발견됐다. 커폰은 용의자로 몰렸고 술집의 불법 도박과 매춘 등이 경찰의 원치 않는 관심을 얻게 되었다. 당시 더피는 아내를 베개로 눌러 살해하고 도피하던 중이었다. 경찰이 더피의 아내 살해를 조사하게 되면 노스 사이드 갱의 활동도 덩달아 파헤쳐질까봐 염려한 오배니언이 더피를 살해하면서 이를 커폰과 토리오에게 뒤집어 씌우려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월, 경찰이 자신의 양조장을 급습할 거란 정보를 얻은 오배니언은 토리오에게 은퇴할 생각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양조장 인수 의향을 물었다. 토리오는 이를 받아들여 오배니언에게 선불로 50만 달러까지 지급했다. 예상대로 쳐들어온 경찰은 양조장을 폐쇄시키면서 토리오와 오배니언을 체포했고, 토리오는 밀주 제조 누범으로 징역형에 처해지게 된다. 토리오는 바로 오배니언을 죽이려 했으나 이번에도 시카고 갱단 사이의 평화 유지를 최우선으로 여기던 마이크 멀로가 노스 사이드 갱에 대한 모든 종류의 폭력을 금지 시켰다.
그러나 암에 걸려있던 멀로가 11월 8일 44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토리오를 억제할 상급자가 사라지게 된다. 바로 이틀 뒤인 10일 오배니언은 꽃을 사는 척하며 자신이 운영하던 꽃가게에 들어온 세 명의 이탈리아계에게 총을 맞아 살해 당했다. 프랭키 예일, 존 스칼리스[8], 알버트 안셀미[9]가 강력한 범인 후보들로 여겨지고 있다.
오배니언은 부하들 사이에서 인망이 두텁던 지도자였다. 빈센트 드루치[10]와 조지 "벅스" 모란[11]의 지지 하에 오배니언의 절친인 얼 "하이미" 와이스[12]가 노스 사이드 갱의 새 우두머리로 올라섰다. 와이스는 딘 오배니언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노스 사이드 갱의 최중요이자 최우선 목표로 삼고 시카고 아웃핏과 대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25년 1월 12일, 노스 사이드 갱은 먼저 토리오의 오른팔 커폰의 암살부터 시도했다. 커폰의 운전사가 총상을 입었을 뿐 커폰 본인은 기적적으로 단 한 방도 맞지 않았지만 커폰은 이 일로 충격을 받아 개조방탄차를 만들게 된다. 드루치, 모란, 와이스는 바로 토리오의 경호원들을 납치, 고문해 토리오의 행동 반경을 알아낸 뒤 결국 경호원들을 죽여서 강에 버려버린다. 24일 셋은 아내와 장을 보고 귀가하던 토리오에게 총격을 가했다. 토리오는 턱, 폐, 다리, 복부 그리고 영 좋지 않은 곳에 총을 맞았는데 놀랍게도 살아남았다. 치명타를 날리려던 결정적인 순간에 총이 불발했던 것이다. 곧 경찰이 도착해 셋은 자리를 떠야했다. 이후 토리오는 평생 목의 상처를 스카프로 가리고 다녔다.
그 다음 차례는 당연히 제나 형제였다. "블러디" 앤절로 제나[13]는 머란이 총으로 쏴죽였고 마이크 "더 데블" 제나[14]는 노스 사이드 갱과의 총격전 중에 출동한 경찰들 쪽으로 총구를 겨눴다가 경찰의 총에 사망했다. 제나 가문의 돈줄 새뮤얼 "사무츠" 애머투너[15]는 드루치가 죽였다. 이어 앤토니오 "더 젠틀먼" 제나[16]까지 살해 당하자 남은 제나 형제들은 황급히 시카고를 탈출해버렸다. 제나 형제의 예전 구역은 노스 사이드 갱과 시카고 아웃핏이 자연스럽게 나눠 차지했다.
응급 수술을 받은 토리오는 서서히 회복이 되었다. 이때 앨 커폰이 자신의 두목(Boss)이 안전한지 확인하려고 24시간 경계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두 갱단의 마찰과 암살 시도는 끊임없이 일어났고 이는 결국 1929년 2월 14일의 밸런타인 데이 학살로 이어졌다.
2.3. 말년
병원에서 나온 뒤에 1년 징역살이까지 한 토리오는 살아있을 때 은퇴하기로 한다. 그는 최고 고문 비슷한 위치로 물러난다. 그리고 앨 커폰에게 "그건 전부 너의 것이다"라며 시카고 아웃핏 조직을 물려주었다. 그렇게 그는 도박, 매춘, 밀주로 쌓아올린 7천만 달러, 2018년 기준으로는 9억 9천7백50만 달러의 자산가치에 달하는 자신의 범죄 조직을 떠난다.1925년 말에 이탈리아로 돌아온 토리오는 아내, 어머니와 살았다.
그러나 1928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마피아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으로 돌아온다. 이후 토리오가 결성을 도운 이스트 코스트 밀주업자 연합 빅 세븐[17]은 러키 루치아노, 프랭크 코스텔로, 마이어 랜스키, 애브너 "롱기" 즈윌먼[18], 조 아도니스[19] 등의 암흑가 거물들이 거쳐간 곳이다. 토리오는 또한 자신이 시카고에서 겪었던 갱들 사이의 전면전을 막기 위해 랜스키, 루치아노, 카스텔로와 함께 1929년 5월 애틀랜틱시티에서 회의를 갖고 전미범죄연합체[20]를 창설했다.
1936년 소득세 탈루가 걸려 1939년 감옥으로 보내져 2년 실형을 살았다. 1940년 커폰의 세금 체납을 해결하기 위해 커폰, 버넬러, 재정 고문 제이컵 "그리시 섬" 구직[21]과 토리오가 공동 소유해온 부동산이 경매에 부쳐졌다.
2.4. 죽음
출옥 후 조용히 살다가 1957년 4월 16일 뉴욕 브루클린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던 중 의자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뒤 몇 시간 후 사망한다. 향년 75세.[1] Robert Vanella.[2] Harvard Inn.[3] Charles Dean "Deanie" O'Banion.[4] 이탈리아식으론 젠나.[5] Unione Siciliana.[6] Mike Merlo.[7] John Duffy. 엄밀히는 조직에서 별 역할을 하지 않고 빌붙어 지내고 있었다.[8] John Scalise.[9] Albert Anselmi.[10] Vincent Drucci.[11] George "Bugs" Moran.[12] Earl "Hymie" Weiss.[13] "Bloody" Angelo Genna.[14] Mike "The Devil" Genna.[15] Samuel "Samoots" Amatuna. 이외에도 Samuzzo, Sam 등 별칭이 많았다. 출생시 이탈리아 이름은 살바토레(Salvatore).[16] Antonio "The Gentleman" Genna.[17] Big Seven.[18] Abner "Longy" Zwillman.[19] Joe Adonis.[20] National Crime Syndicate.[21] Jacob "Greasy Thumb" Guzik. 별명은 구직이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찔러주며 소위 기름칠을 하는 데에 도가 텄던 점을 겨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