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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6년 5월 18일 |
경상남도 합천 | |
사망 | 1944년 4월 2일 |
경상남도 합천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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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919년 3월 20일의 대병면 창리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그는 3월 1일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얻어 가지고 귀향했다.그는 귀향직후 이곳 유지인 권중박, 정시권, 유인수, 권양희, 송헌기 등을 초청해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했다.
참석자들이 이에 찬성하자 그는 이들과 3월 20일의 창리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한편, 인근 부락에도 이 계획을 알려주었다. 3월 20일 오후 1시경, 그는 장터에 모인 4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준 뒤,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장터를 시위행진하고 창리 경찰주재소로 가서 그곳을 포위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정문을 박차고 소내로 돌진했다.
이때 선두에서 돌진하던 이병추가 순사부장이 발사한 총탄에 관통되어 유혈이 낭자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소내로 밀어닥쳐 순사부장과 경찰들을 실신할 정도로 구타하고, 문서류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했다. 이어 주재소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대병면사무소로 달려가 또한 문서류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했다. 그러나 응원 출동한 수십명의 일본군은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고 시위군중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