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14 01:35:13

일승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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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야오 고성 내의 일승창 본점 외부 모습
파일:중국 일승창 5.jpg
사합원 형식의 내부 구조

간체자 日升昌票号 (르셩창퍄오하오)
번체자 日升昌票號 (일승창표호)
영어 Rishengchang Piaohao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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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승창의 4대 현판 중 하나인 회통천하 (匯通天下). 동아시아 금융 중심지이던 시절의 위상을 상징한다.

산시성 진중시 핑야오 고대도시에 위치한 중국 최초의 근대식 은행이다. 본래 안료 상점이던 일승창 안료장 (日升昌 颜料庄)을 현지인 상인 뇌이태 (雷履泰, 1770 ~ 1849년)가 산서 상인들의 상술을 체계화한 일승창 표호(日升昌 票号)로 전환하여 1823년 설립되었다. 안정적인 수표 거래를 활성화시킨 일승창은 전성기이던 19세기 중반 중국 경제의 절반을 장악하였고, 한때 러시아와 몽골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까지 지부를 둘 정도로 동아시아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후 점차 중국 경제가 외국 열강들에게 종속되고, 동남 해안을 중심으로 서양식 은행이 보급되며 결국 그에 대체되었다.

2. 역사

명청대 은본위제에 기반한 중국 내륙 교역이 활성화되며 성장한 산서 상인 (진상,晋商)들은 은을 수레에 싣고 오가는 기존의 원거리 상거래 방식을 바꾸고자 하였다. 교통로마다 은을 노리는 도적들이 도사리고 있어 상인단을 보호할 경호 단체인 표국(鏢局)을 고용해야 했는데, 그 비용이 점차 높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주요 도시에 지점을 설립하고, 지점의 산서 상인에게 (당송대부터 있던) 수표를 주고 현지에서 은을 조달하였다. 대신 대가로 소량의 이자를 제공하였다. 다만 이러한 방식은 산서 상인 중에서도 신뢰 관계가 있는 지인끼리만 이루어졌다. 현재까지도 화북 지방의 옛 도시들에 산서 상인들의 회관이 여럿 남아있는 것은 그러한 신뢰 관계를 돈독히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핑야오 출신의 상인 뇌이태는 어릴 때부터 성내의 안료 가게 일승창 (의미: 해가 승천하고 번창함)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이렇게 설립된 일승창은 급속히 성장하여 19세기 중후반 태평천국 운동기에 지방의 표호들은 마비되어버린 조정의 조운 체계를 대신하여 세금을 북경으로 운송하였고, 이로써 청조의 신임을 얻어 반란 이후 지방 성 정부들의 재정과 해외 차관 도입 등 지역 경제의 큰 축을 맡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23개의 표호와 475개의 지점이 중국 각지에서 영업하였고, 중국은 물론이고 조선과 일본, 몽골에까지 지점을 낼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하였다.

뇌이태의 4대 운영 원칙

1. 임용한 사람은 의심하지 않고, 의심가는 사람은 임용하지 않는다.
2. 인력 채용은 시험을 통해 엄격히 하고, 업무 기능과 직업 도덕 교육을 충실히 시킨다.
3. 표호 규정은 엄격히 준수한다.
4. 장부 관리를 엄격히 한다.

하지만 이 일승창 은행도 20세기에는 운영난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결국 일승창은 1930년에 페업하였다. 1932년에 전직 일승창 운영진이 일승창의 이름을 빌려 일승창 은행을 개업했지만 이 일승창 은행마저도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의 혼란을 감당하지 못하고 1948년 폐업하며 일승창은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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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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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추극 (紫垣樞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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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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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공호의 (急公好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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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일응휘 (麗日凝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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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