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명 | 마츠나가 마사히사(松永昌久)[1] 마츠바라 마사히사(松原昌久)[2] |
이명 | 이종효(李鍾孝)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00년 10월 8일 |
경상북도 영천군 망궐면 노상동 (現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354번지) | |
사망 | 1974년 11월 26일 (향년 74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782호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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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일제강점기 당시 예천무명당에서 활동한 공로로 200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2. 생애
1900년 10월 8일 경상북도 영천군 망궐면 노상동(現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354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예천군 예천면 남본리 222번지로 이주했다. 1920년에 봉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 경북 임시교원양성소에 속성과정으로 입학하였다. 속성과정을 마친 후 그는 그 해 12월부터 영주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1931년에는 의성군에 위치한 소문공립보통학교에서 근무했고 그 다음해에는 예천공립보통학교에서 근무하였다.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3]1932년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면에서 한일청, 김기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예천무명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사방그룹, 역그룹, 교원그룹, 봉급자그룹 등을 결성하며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과 동지규합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예천공립보통학교에서 재직 중이던 그는 동료의 권유로 결사에 참가하게 되었고 교원그룹의 책임을 맡으며 학생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하고 학원가를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또 다른 교사들을 예천무명당에 가입시키고 동료들을 조직으로 포섭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던 중 1934년에 활동들이 모두 발각되면서 일본 제국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1934년 10월 16일, 1935년 1월 17일, 1935년 4월 16일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구류갱신 결정 처분이 내려졌으며, 1935년 5월 10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우편법 위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사기, 절도 등의 혐의[4]로 징역 2년(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5]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유해는 2008년 4월 2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