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2-07 00:22:19

이용수

1. 한국의 축구인2. 더 파이팅 등장인물3.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3.1. 강제동원에 대한 증언
3.1.1. 1993년 첫 번째 증언3.1.2. 2004년 증언3.1.3. 2006년 증언3.1.4. 2014년 7월 증언3.1.5. 2014년 9월 증언3.1.6. 2017년 증언
3.2. 귀국 후 삶에 대한 증언
3.2.1. 93년 증언3.2.2. 99년 증언
3.3. 도와준 일본 장교에 대한 증언
3.3.1. 98년 증언3.3.2. 2015년 증언

1. 한국의 축구인

이용수(축구)

2. 더 파이팅 등장인물

마쿠노우치 잇뽀의 16번째 대전 상대(챔피언 방어전으로는 세번째). 모티브는 아마도 90년대 후반 한국 대표 복서이던 최용수인 듯. 작중에서 높게 평가하는 WBA 챔피언이자 체급도 비슷하다.

일본 애니의 한국인 캐릭터. 랭킹 5위의 수입 복서라고 하며, 평판은 꽤 세다고 알려진 듯. 타카무라 마모루 vs 브라이언 호크전의 세미파이널 시합으로 일보와 대결했다.

공이 울리자마자 선공으로 꽤나 펀치력 있는 레프트를 날렸지만 일보의 뎀프시롤에 1 라운드만에 KO 패.

좀 더 필설하면, 뎀프시롤의 최초 레프트 훅은 피한 건지 못 맞춘 건지 턱끝을 스쳤고, 다음에 오는 라이트 훅에 맞춰 라이트 카운터를 꽂으려 했으나 스친 턱의 데미지가 다리로 와서 카운터는 실패하고 좌우로 퍽퍽퍽퍽퍽 콰당 땡땡땡 시합 끝(...).

카모가와 겐지 관장에 의하면 쉽게 이기긴 했지만 스친 첫 방이 럭키라서 내용상으론 0점짜리 시합.

스토리 흐름상 주 내용이 마모루의 시합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보전을 KO로 화려하게 장식할 샌드백이었다. 일보의 상대로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선수라는 컨셉으로 나온 듯. 실력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그나마 뎀프시롤의 약점에 대한 떡밥을 뿌렸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한국 복싱이 끝발 날리던 것도 과거 얘기긴 하지만. 허리케인 죠김용비 항목과 비교해보자. 눈물이 앞을 가린다.

3.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1928년 12월 13일 대구부 금정2정목(현 대구광역시 북구 고성동)에서 6남매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본적은 성주군 벽진면 봉계동이다.#&@ 부잣집 유모 생활을 하는 어머니 대신 남동생 4명을 키웠다고 한다.

2007년 2월 15일, 미 하원 외교위에서 열린 "종군위안부 결의안(HR121호)"에 대한 회의에 증인으로 참석하였다. 기사 참조

2012년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할머니에게 뒷 번호를 배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아예 탈락을 시켰다.

2017년 촛불집회에 3월과 5월 참가했다. 98주년 3.1절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하고, 진정한 광복 맞자”

2017년 5월 성주 사드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

2017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개봉 되면서, LA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YTN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대통령이 국빈 방문을 하면서 만찬을 가졌을 때, 초대되어 트럼프 대통령과 포옹을 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사실 이용수 할머니는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에 비하면 아직까지 건강한 편이라 대외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며,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표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이용수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증언들은 다음과 같다.

3.1. 강제동원에 대한 증언

3.1.1. 1993년 첫 번째 증언

내 동갑내기 친구 중에 김분순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집에 놀러가니까 그 어머니가 “너 신발 하나 옳게 못 신고 이게 뭐냐, 애야, 너 우리 분순이하고 저기 어디로 가거라. 거기 가면 오만 거 다 있단다. 밥도 많이 먹을 거고, 너희집도 잘 살게 해준단다”라고 했다. 당시 내 옷차림새는 헐벗고 말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곤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 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 길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까지 갔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았다.
경주에 가서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 앞 개울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산비탈에 보라색 꽃이 한송이 피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이어서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까 도라지꽃이라고 했다.
거기서 이틀밤인가를 지냈는데 또 여자 두 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자가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지나가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의 깨진 유리 차창 저편에 우리집이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집생각이 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난 우리 엄마에게 가야 한다고 하면서 막 울었다.
옷보퉁이를 밀치며 이거 안 가질테니 집에 보내 달라고 하며 계속 울었다. 울다가 지쳐서 곯아떨어졌는데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
여러 날을 간 것 같다.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
여성가족부의 일본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에 93년 증언 전문이 기록되어있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3.1.2. 2004년 증언

대구 고성동에서 16살까지 살았고, 1943년 어느 여름 16살때 코와 입밖에 보이지 않는 모자를 쓴 일본군인이
동네언니 4명들과 함께 우리를 강제로 끌고갔다.
어디로 가는지 왜 데려가는지도 몰랐다.
창문이 없는 기차에 우리를 태웠는데, 가지않겠다고 하니 조센징이라고 하면서 구둣발로 밟고 때렸다.
집에 가겠다고 하니 또 때리더라. 너무 많이 맞아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3.1.3. 2006년 증언

열 다섯살이던 1942년 경 집에서 자다가 일본군에 의해 대만으로 끌려갔다.
동아일보

3.1.4. 2014년 7월 증언

15살이 되던 해 어느날 일본 군인이 '이리오라'는 손짓을 했다. 무서워서 도망갔는데 또 다른 일본 군인에게 붙잡혀 기차를 타고 대만의 한 일본군 부대로 끌려갔다. 뉴시스

3.1.5. 2014년 9월 증언

16세에 원피스와 빨간 가죽구두를 보여주며 '배불리 먹여주고 집도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일본 남자의 말에 속아 친구와 함께 따라 나섰다. 중국을 거쳐 대만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다. 위안소의 주인이었다. 이 주인에게 전기고문도 당했다. #[1]

3.1.6. 2017년 증언

열 다섯살에 집에서 자다가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다.

증언을 할 때마다 내용이 엄청나게 바뀐다. 몇가지 사소한 부분은 성폭행 피해의 트라우마로 기억이 오락가락 할 수 있다지만 이렇게 전혀 다른 사건이거나 모순이 생긴다면 어물쩡 넘길 것이 아니라 왜 저런 모순이 생겼는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인데 그 부분에 대한 검증을 요구하기엔 사안이 사안인지라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더구나 기억상 혼동이라 보기도 어려운 점은, 93년 증언에서는 국민복에 전투모를 쓴 40대 남성이라 지칭할 정도로 구체성이 강한데
이 증언을 무시하자면, 뒤의 오락가락 증언에 대한 신뢰도도 대폭 하락할 수 밖에 없다.


귀국 후의 삶에 대한 증언 역시 일관되지 못하다.

3.2. 귀국 후 삶에 대한 증언

3.2.1. 93년 증언

대만에서 2년동안 있다 귀국 뒤 술집종업원, 가정부 등 밑바닥 생활을 떠돌다가 가족들의 끈질긴 권유로 지난 87년 60살의 나이로 8남매를 둔 75세 노인의 후처로 들어갔다. 때늦었지만 면사포도 써보고 혼인신고도 처음이고 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5년동안 살면서 돌아온 것은 치매걸린 남편의 행패와 폭력, 가족들의 냉대 뿐으로 지난 3월 위자료 한푼 못받고 이혼하고 말았다. #

3.2.2. 99년 증언

일제 당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야학에서 한문 등을 배웠으나 43년 16세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대만에서 고생하다 해방 이듬해인 46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결혼을 하지않고 보험회사 등에 다니며 홀로 지냈다. #

3.3. 도와준 일본 장교에 대한 증언

3.3.1. 98년 증언

16살때 일본군 막사에 들어가지 않으려다 두들겨맞고 초주검이 되어있는데, 21살된 이 장교가 데려가 보살펴줘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 장교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죽으러 간다"며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대만에 가서 이름도 모르는 장교였지만 인형에 '하세가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영혼결혼식을 치뤘다. 중앙일보

3.3.2. 2015년 증언

17살에 가미카제 부대 안에 있는 위안소에 끌려가 어린 일본군인을 만났다. 그 군인은 위안소에서 맞고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나에게 도움을 주고 '도시꼬'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군인의 이름은 '하야까와 기꾸쇼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야까와는 어느 날 저녁 "내일 죽으러 가야 된다"고 하면서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하야까와는 "도시꼬, 너의 부모별도 있고 나의 부모별도 있어. 내가 내일 죽으면 별이 하나 떨어질 거야"라고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하야까와는 다음날 보이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1945년 5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었다.


정리하자면 위안부에 끌려간 과정만 봐도 여성가족부에서 조사했던 바에 따르면 이웃의 농간과 수동적 자발성이 곁들여져 위안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후에는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다고 주장하며,이 강제로 끌려간 과정도 어떨 때는 자는중에 납치,어떨 떄는 도망가다 납치를 당하는 등 차이가 상당하다. 결혼여부도 매우 오락가락한다.처음에는 결혼을 했었다. 결혼을 한 적이 없다. 더불어 영혼결혼식까지 올렸다하는 둥,일관성이 결여된다.



[1] 링크는 아시아경제의 인터뷰들을 모아놓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