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4 13:29:10

이야포 폭격 사건


1. 개요2. 전개3. 이후 진상규명

1. 개요

1950년 8월 3일 미군 전투기가 300~350여 명의 피난민이 타고 있던 화물선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여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

2. 전개



한국전쟁 당시 전쟁이 한참이던 1950년 8월 2일 화물선에 피난민 300~350여 명이 타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갑판과 아래 선실에 꽉 들어차 있었다. 배는 승객들의 무게 때문에 뱃전의 난간이 수면에 거의 닿을 듯했다고 한다. 1950년 7월 21일 피난민들은 부산항을 출발해 충무에서 일주일 머물고 욕지도에서 5일을 머물렀다. 정부는 피난민들을 다시 배 세 척에 나눠 이동시켰다. 경찰은 깃발로 배에 정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해당 피난선은 꼼짝없이 안도 이야포 안으로 들어와 정박해야 했다. 이게 8월의 상황이었다.

1950년 8월 3일 아침, 피난민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무렵에 사건이 일어났다. 이야포 남쪽 소리도 쪽에서 4대의 전투기가 날아왔고, 비행기 4대가 나란히 호수같이 잔잔한 이야포 바다 위를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피난선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대형으로 일자로 바꾸더니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곤두박질치며 피난선에 기관총을 발사했다. 비행기 앞코에 기관총 6정이 달려 있었는데 어른 손가락보다 큰 총알을 숫제 쏟아붓듯이 내리쏘았다. 기관총이 피난선을 훑고 지나가자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픽픽 쓰러졌다. 뱃전에 있던 사람은 바다로 떨어졌고, 쪼그리고 숨은 사람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비행기까지 총알을 쏟아부으며 지나갔다. 사람들의 피가 튀고 몸에서 살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갔다. 사람들이 갑판 아래 선원실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내려가는 계단에도 이미 시체가 쌓여 있었다. 비행기는 다시 돌아와 아까처럼 총알을 쏟아부었다. 총알이 갑판을 뚫고 들어와 선실로 숨어든 사람들까지 쓰러트렸다. 그 당시 학살에서 생존한 이춘송은 2009년 3월 5일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1950년 8월 3일 아침 아버지가 육지로 나가서 손수 지어온 밥을 먹고 난 뒤 오전 9시경 미군 제트기 1개 편대(4대)가 날아와 처음에는 기관총 두 발을 신호처럼 먼저 쏘고 난 뒤 연속적으로 섬을 돌면서 배를 향해 무차별 기총사격을 가했어. 탈출하는 사람들에게도 기총사격을 했지. 시 배 위 선장실 뒤쪽 물통 뒤에 기대어 현장을 직접 목격했는데, 사격을 할 때마다 7~8명씩 배 안팎으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제트기가 돌아와서 탈출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사격을 가하여 바다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어. 주위에는 머리 터진 냄새,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아우성 소리, 엄마ㆍ아버지 부르는 소리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죽은 사람들의 피가 머리 위에서 흘러내려 온몸이 피로 물들었지.

피난민들은 미군 비행기가 바다에 뜬 다른 작은 배들과 뭍은 놔두고 피난선에만 총을 쏜다는 걸 깨달았다. 살려면 무조건 바다를 헤엄쳐 몽돌밭 해변으로 올라가야 했다. 제트기가 세 번째로 날아왔다. 이번에는 4대가 옆으로 나란히 하고 다가왔다. 사격 반경이 넓게 펼쳐져 있었기에 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는다면 피난선과 물에 뜬 사람들은 피할 길이 없었다. 피난민들은 수영을 할 줄 몰라도 무조건 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앞서 증언을 남긴 이춘혁 소년도 배에서 뛰어내렸다. 소년은 섬 주민들의 멸치잡이 뗏목을 배에 붙여 막냇동생을 업은 엄마를 태웠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는 바람에 뗏목이 뒤집혀 엄마가 물에 빠졌다. 간신히 엄마를 뗏목에 다시 붙들어 놓았지만 업은 아기와 물을 먹은 미군 모포 포대기의 무게 때문에 뗏목에 올라탈 수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200~250명 이상이 죽고 다쳤다. 말 그대로 의도적인 민간인 살상이었다.

3. 이후 진상규명

한국전쟁 당시 다른 민간인 학살들과 마찬가지로 이야포 폭격 사건은 오랜세월 묻혀 있었다. 유족인 이춘혁과 이춘송 형제는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안도 이야포 마을 사람들을 만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2010년 진실규명 결정을 받고서도 이야포 사건은 조명받지 못했다. 2017년에 이르러서야 지역 언론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변변한 위령제 한 번 지낼 수 없었는데 2018년 처음으로 조촐하게 위령제가 열렸다. 2022년 8월 3일 처음으로 민관 합동 위령제가 열렸고, 이어서 8월 18일 피해자 유족과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위령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심명남)가 여수시와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