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퍼트넘[1] Israel Putnam | |
출생 | 1718년 1월 7일 |
13개 식민지 매사추세츠 만 직할 식민지 세일럼[2] | |
사망 | 1790년 5월 29일 (향년 72세) |
미국 코네티컷주 브루클린 | |
복무 | 코네티컷 민병대 대륙군 |
최종 계급 | 대륙군 준장 |
복무 기간 | 1755~176?(코네티컷 민병대) 1775~1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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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독립 전쟁시기의 군인.2. 생애
매사추세츠 식민지 세일럼에서 태어났고 22세부터 코네티컷주 모틀레이크로 이주해 부농이면서 술집 주인으로 일했다. 1755년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식민지에서 발발하자 민병대에 자원했다. 로버트 로저스의 레인저부대에 소속되어 프랑스군의 후방을 기습했으며 프랑스를 지지하는 원주민을 토벌하는 작전에 참가했다.1758년 소령으로 진급해 코네티컷 민병대장으로 임명되어 디트로이트 구원에 나섰다가 카오나와케족에게 잡혀 화형당할 위기에 처하나 프랑스군 장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캐나다, 쿠바에서 프랑스군과 맞붙었고 전후 제대했다. 이후 영국이 과세를 올리자 반발해 코네티컷 상원의원에 선정되었다.
1775년 농사를 짓고 있던 도중 렉싱턴 전투가 발발하자 쟁기를 던지고 대륙군에 입대해 코네티컷 민병대의 준장으로 임명되어 보스턴으로 이동햏다. 얼마 안가 소장으로 진급했고 알테마즈 워드에게 지휘권을 부여받고 벙커힐 전투에서 윌리엄 프레스콧과 함께 영국군을 격파했다.
이후 잠시 대륙군 총사령관[3]을 맡았으나 본격적인 독립전쟁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조기퇴각해 비판을 받았으나 조지 워싱턴은 용서하고 모병관으로 보냈다. 얼마 안가 전선으로 복귀했으나 몽고메리, 클린턴 요새를 뺏기고 의회에 소환되었다. 다행히 무죄를 선고받았다. 1779년 뇌졸중으로 군 생활을 마감했다.
야인으로 살다가 1790년 사망했다.
퍼트남은 술집주인이라는 출신으로 알 수 있듯,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고 세련된 예절을 갖추지도 못했지만, 사교적이고 리더쉽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워싱턴, 워드 등의 고위 지휘관들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그들의 휘하에서 좋은 관계를 맺었기에 그의 상관들도 그를 존경했고, 특히 워싱턴과의 친분이 돈독했다. 복잡한 전략 전술을 논하는 데에는 서툴렀으나, 강한 의지와 용기를 가졌기에 병사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반란을 일으킨 부하들을 연설 한번으로 휘어잡을 정도였다. 오늘날에도 그의 이름은 그 이름을 딴 많은 지명들과 사적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