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李命允.(1804년 2월 13일 ~ 1863년 5월 7일)
호는 안호(安湖), 본관은 전주로, 조선 정종의 열번째 아들 덕천군 이후생(李厚生)의 14세손이었다.
그가 역임한 주요 관직으로는 홍문관교리가 있다.
2. 생애
그는 관직에 오르지 못한 선대와는 달리 1838년(헌종 4) 알성시 문과에 을과 1위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휘릉별검·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홍문관부수찬·홍문관부교리 등을 역임했다.그후 철종 대에 들어서 1858년(철종 9)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 진주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1862년에는 임술농민봉기의 배후로 지목된 탓에, 사태를 수습하러 가야했다. 초군들이 요구하는 도결 혁파 문서를 목사를 시켜 작성하게 한 다음, 그것을 (초군들에게) 보여주는 식으로 수습에 힘썼다.
봉기가 진압되고 난 뒤에는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의 고금도(현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에 유배되었다. [1] 이후, 1863년 5월 7일 생을 마감하고 한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