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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1년 3월 16일 | ||
대한민국 평안남도 진남포 비석리 (現 진남포 비석동) | |||
사망 | 1967년 5월 26일 (향년 47세)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47a0><colcolor=#fff> 부모 | 부친 - 윤진원 모친 - 이득옥 | |
학력 | 진남포상공학교 (전학) 평양상업고등학교 (중) |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1990) 건국포장(1977) 대통령표창(1963) | ||
군사 경력 | |||
복무 | |||
한국광복군 | |||
1941년 ~ 1945년 | |||
주요 보직 | |||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6분처 소속 화중지구 전방공작원 한국광복군 제3지대 화중지구 특파공작대장 한국광복군 제3지대 남경지구 군사특파단 부단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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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921년 3월 16일 평안남도 진남포부(鎭南浦府) 비석리(碑石里)에서 부 윤진원 모 이득옥의 2남2녀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은 윤서용(尹書龍)이다. 1941년 진남포상공학교를 마치고, 의병항거하다 불구가 된 부친의 교화에 만주로 단신망명 독립군에 투신하였다.만주 지역에서 항일 독립군 활동을 펼치다 1943년 3월 중국북경에서 광복군으로 현지 입대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의 지시로 화중지구 전방공작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군 징모처(徵募處) 제6분처에 편입되어 제3지대 창설 기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화중지구 서주, 천진지역 전방공작원으로 특파 학도병을 대거 탈출시키는데 도모하였다. 이와 함께 애국 동포를 모집하여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초모 공작 및 광복군의 공작 거점을 확보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비밀 지하 조직망을 확장하고 군자금을 조달하며 병력 초모를 통해 일본군 첩보를 탐지ㆍ폭파하는 등의 게릴라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같은 공작활동으로 광복군 제3지대 확장개편에 일조하였다.[1]
1944년 김학규가 중국군과 협의하여 중앙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약칭 한광반)을 설치하자 50여명의 동지와 함께 입대하여 5개월간의 교육훈련과정을 마치고 1기생으로 졸업, 중국군 준위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10월 한인 청년 이윤하(李允夏)·이정수(李廷秀)·홍순명(洪淳明)·김광언(金光彦) 등과 접선하였고, 이들은 곧 제3지대의 근거지인 푸양으로 가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로 정식 편성되자 화중지역 공작책임자로 임명되어 부하를 인솔하고 쉬저우 · 칭다오[靑島] · 지난[濟南] 등지에 잠입하여 초모공작 · 군자금조달 · 일본군 정보수집공작 · 일본군 군사시설 파괴공작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3월에는 중국중앙군 유격대와 협의하여 귀덕역(歸德驛) 구내에 정차중인 일본군 탄약수송열차와 귀덕역 군수 유류창고를 공습하여 폭파시켰고, 4월에는 미군 · 중국군과 정보수집공작에 참여 하였다.
이같은 활동중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8.15 광복으로 임시정부 환국이후, 남경지구군사특파단 부단장으로 중국에 남겨진동포들의 생명과 신변보호, 광복군의 훈련, 중국과의 협력(일본군 무장해제 등)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6년 6월 남경지구 특파단의 잔류동지와 광복군 공작 활동에 우호조력자였던 동포, 중국인 등과 함께 귀국한 후 1947년 임시정부 사정국 인천지구 총책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1953년 전쟁이 휴전되고 강원도 춘천에서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돌보기위해 춘천시의 협조와 친인척의 참여, 춘천역 앞 주둔중이던 미군부대의 원조와 협조를 받아 춘천보육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1967.5월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쓰러져 수일만에 서울 삼양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고인의 유해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3. 여담
- 황해와의 일화
영화배우 황해(본명 전홍구)가 일제강점기 때 독립군정보원으로 중국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 김구주석을 도왔다. 황해는 1944년 악극단 신태양의 단원으로 중국 대륙을 순회공연하면서 일본군부대를 위문할 때면 그 부대에 있는 한국인병사와 접촉, 정보를 수집해 임시정부 정보책인 윤창호에게 극장분장실 등을 접선장소로 해 일본 군대의 기밀을 제공해 임시정부를 크게 도왔다. 윤창호는 황해가 준 정보를 토대로 일본 군대에 있는 한국인 병사를 독립군으로 데려오는 등 황해의 정보를 크게 활용했다. 황해는 46년 5월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고국에 온 후 윤창호로부터 두어차례나 독립유공자표창을 상신하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때마다 한국인이면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라며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이와같은 사실은 몇해전 윤창호가 작고하면서 부인에게 유언을 남김으로써 알려지기 시작했다고한다.경향신문
- 1.4후퇴 당시일화
일본제국주의 항거로 의병활동 중 무릎부위 총상으로 불구가 된 부친(윤진원)이 하얀 백발의 몰골로 지팡이등에 의지해 절둑거리며 남쪽으로 황해도 어느 지역을 지나며 피난하는 모습에(전쟁통에 자신의 부친인지 알아보지 못하고)뒤에서 짚차를 타고가던 윤창호가 절둑대며 걷던 노인에게 ‘할아버지 어딜가시냐’ 물으니? ‘아들내미 찾으러 내려간다오’ 하기에 ‘아드님 이름이 뭐냐고 묻자?’ ‘윤창호라 하오’ 하기에 깜짝 놀라 짚차에서 내려 ‘아버지 제가 창호입니다’하며 인사를 하고 생사를 알수없던 부친과의 재회로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 한국전쟁 휴전 이후 보육원 운영일화
1953년 전쟁이 휴전되고 강원도 춘천에서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돌보기위해 춘천시의 협조와 친ㆍ인척의 참여, 춘천역 앞 주둔중이던 미군부대의 원조와 협조를 받아 춘천보육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4. 관련 인물
- 유순희
1945년 2월 유순희(劉順姬)는 광복군 제3지대 화중지구 지하공작원이었던 윤창호로부터 지하공작원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을 수여받고 광복군3지대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으로 입대하여 광복이 될때까지 조극독립투쟁을 위해 적극 활동하였다.공훈전시자료관
- 박기은
1944년 광복군 제3지대와 연결되어 일본군 점령 지역 내 지하 공작에 참여하던 중, 윤창호(尹昌浩)와 접선하여 이원하(李元河)·신조일(申朝日)·이득우(李得雨)·신응녀(申應女) 등과 일본군 점령 지역을 탈출해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에 합류하였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김의명
1944년 10월 베이징과 톈진지구에서 전방공작원으로 활동하던 김광언(金光彦)·이정수(李廷秀)·이윤하(李允夏)·홍순명(洪淳明)·김영진(金永鎭)·선우석(鮮于碩)·김순근(金順根) 등과 함께 광복군 징모 제6분처 화중 특파공작대 윤창호(尹昌浩)의 인솔 아래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으로 이동하였다. 1945년 1월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되어 본부요원으로 활동하였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위 내용은 윤창호의 유가족과의 인터뷰를 거쳐 2024년 제2차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역사답사팀의 '독립운동가 위키 정보 수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1944년 1월 광복군 제3지대 소속인 윤창호와 백운룡(白雲龍)이 일본군 점령 지역의 일본군 동태 파악 및 군자금 조달 등의 활동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