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평 사람으로 본래는 백성이고 611년에 무리를 모아 장백산을 점거하고 제, 제의 교외 등에서 약탈하면서 지세랑(知世郞)[1]이라 칭했으며,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2]를 지어 여러 사람을 권고해 군대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 왕박에게 귀부했다.
613년에 장수타가 태산 아래에서 공격했고 왕박은 대비하지 않다가 패배했으며, 남은 군사들을 수습해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다가 장수타의 추격을 받아 임읍에서 격파당했다. 손선아, 학효덕 등과 10여 만과 연합해 장구를 공격했지만 장수타가 거느린 2만의 군사에게 격파당했다.
이밀이 찾아왔지만 그를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618년에 우문화급이 수양제를 죽여 조정을 장악하고, 619년에 우문화급이 진기한 물건으로 유인하자 왕박은 무리를 인솔해 우문화급과 함께 요성을 지켰다. 우문화급이 멸망한 후에 왕박은 땅을 바치고 당나라에 항복해 제주총관에 임명되었으며, 621년에 청주, 내주, 밀주의 여러 주를 설득해 당나라에 항복시켰다.
622년에 성언사와 함께 수창을 공격해 담주에서 군량을 징발했지만 담주자사 이의만과 틈이 있어 받지 못했는데, 수창이 항복하면서 성언사가 이의만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석방하려 했지만 걱정과 분노로 이의만이 죽었다. 그런데 왕박이 담주를 지났다가 이의만의 조카 이무의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1] 세상 일을 다 알 수 있는 남자라고 한다.[2] 노래로 요동으로 가서 헛되이 죽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