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10 19:47:21

오테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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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手杵

천하 3명창 중 하나. 시모우사의 다이묘였던 유키 하루토모가 주문하여, 당시 양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유키 히데야스에게 준 창. 이를 거쳐 마에바시 마츠다이라가의 가보로 전해졌다.

무로마치 시대 시마다국의 도공 고죠 요시스케(五条義助)가 만든 창으로 오테기네의 창(お手杵の槍)이라고도 불리운다. 고죠 요시스케의 이름은 계승되는 이름으로 3대인가 4대인가로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초대가 고쇼, 2대가 에이쇼, 3대가 텐분년 사이경이며, 4대가 덴쇼년 사이경으로 추측되어 오테기네를 만든 도공은 4대 요시스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인 오테기네에는 '절구'라는 다소 뜬금없는 뜻이 있는데, 창신을 수납하는 창집[1]의 생김새가 흡사 절구통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2]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한편 유키 하루토모가 적의 수급을 창에 잔뜩 꿰어서 개선 행진을 하던 도중 가운데쯤 꿰여 있던 수급이 무게를 못 이겨 떨어졌고, 그 모습이 멀리서 보면 흡사 절구질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오테기네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다소 섬뜩한 설도 있다.

1945년 3월, 미군 커티스 르메이의 지휘하에 발생한 도쿄 대공습 당시, 미군의 소이탄이 마츠다이라가의 보물창고를 직격하여, 소실되었다. 당주인 마츠다이라 나오마사의 회상에 의하면, 당시 전화(戰火)를 피하기 위해서 오테기네를 땅속에 묻어 보관할 것을 가족들에게 일러두고 출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문을 모시던 옛 가신 출신 노인들이 감히 집안의 보물을 그런 취급을 할 수 없다면서 막무가내로 거부하였고, 이것이 결국 소실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오테기네를 보관하던 창고의 토장은 습기를 막기 위하여 내부에 숯을 깐 구조였으나, 이것이 오히려 불타는 창고의 내부를 용광로처럼 만들어 버리는 역기능을 해버렸다. 전후에 잔해를 수습, 복원을 의뢰하였으나 너무 불타 단순한 쇳덩어리가 되어버린 상태라 복원이 불가능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 3명창 중 유일하게 소실된 창이 되었다. 이후 유우키 시의 유우키 장미관(結城蔵美館)에서 복제품을 제작하여 상설 전시하고 있다.

날 길이만 4척 6촌(138 ㎝), 봉 길이는 7척 1촌(약 215 ㎝)으로, 전체 길이는 11척 7촌 (약 3.8m). 무게 또한 6관(22.5 ㎏). 이렇다 보니 에도 시대 참근교대 행렬의 우마지루시(馬印)[3]로 쓰였을 때 보통 사람은 운반하기도 어려운 무게 때문에 당시 행렬 맨 앞에 서던 사람들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고 한다(...).


[1]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에도 시대에 와서 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2] 초기의 창집은 기다란 봉의 형태를 취했는데,이후 쥐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절구형태의 모양의 창집이 고안되었다. 이 모양은 후에 더욱 모양의 특성을 강조하여 우마지루시용으로 쓰이기도 하였다.[3] 행렬의 맨 앞의 말을 탄 사람이 드는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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