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은 장연, 도겸, 원술과 동맹하여 원소, 조조 동맹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도겸과 원술이 사망하자, 공손찬은 자신을 향한 원소의 공세가 강화될 것으로 판단하고 북평을 요새화했다. 허나, 공손찬 문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인사 관리가 심히 개판이었던데다[2], 이 요새를 지을 재화를 마련한다고 영지의 주민들을 착취하고 가렴주구를 일삼은 탓에, 공손찬의 군세는 내부에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끝내 역경루에서 자살했다.
[1] 오늘날의 베이징시 인근인 슝안신구의 슝현 일대. 북평이라고 하는 자료도 있는데, 이것은 삼국지 연의에 따른 것으로 북평은 후대의 지명이다.[2] 젊은 시절 노식 아래에서 같이 수학한 사제(師弟) 유비와 뒷날 장판파에서 주군인 유비의 아들 유선을 목숨을 걸고 구해내어 후세에까지 충의의 대명사로 꼽힌 조운도 그를 버리고 떠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