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에우불로스 (고대 그리스어: Εὔβουλος)
생몰년도: 아테네, 기원전 405년부터 아테네, 기원전 330년까지
1. 개요
에우불로스는 고대 아테네의 거물 정치인이다. 반마케도니아주의자였던 데모스테네스와 달리 그리스 세계에서 떠오르는 강자인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평화적인 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다.2. 생애
애우불로스의 젊은 시절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현재 아는 것은 스핀타로스의 아들이었고, 405년에 프로발린토스 데모스 (고대 아테네의 행정 단위)에서 태어났다는 것뿐이다.2.1. 내정: 아테네 재정 회복
355년부터 346년 사이에 에우불로스는 아테네 정계의 주 인물로 떠오른다. 그는 친서민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빈민층과 서민층의 지지를 받고, 동시에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에이스포라(부자들로부터 걷는 전쟁 세금)을 감세하면서 이례적으로 서민층과 부유층의 지지를 동시에 받는다.에우불로스는 외국인들을 겨냥한 정책을 펼친다. 우선 펜테코스테라는 수입과 수출에 부과되는 2%의 관세를 도입해서 재정 상태를 개선하려고 한다. 또 아테네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인 메토이코스들에게 제니카(xenika)라고 부르는 세금을 부과한다. 하지만 외국인들을 유인하기 위해 메토이코스의 명예를 기리는 상징으로써 상위 계층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기병으로 싸울 권리를 준다. 본래 메토이코스는 재산을 막론하고 보병으로, 즉 호플리테스로만 싸워야 했다. 더불어, 원래 아테네인들에게만 주어졌던 도지 소유권을 외국인들에게도 풀어서, 건물을 지은 토지는 구매할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외국인 상인들에게 큰 마이너스 요인이었던 느린 법률 제도를 개혁해서, 외국인 전용 재판소인 디카이 엠포리카이를 설립한다.
에우불로스의 경제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어, 아테네의 재정은 355년부터 351년 사이, 4년에 불과한 기간만에 130 탤런트에서 400탤런트까지 성장한다. 또 예금은행을 개혁해 돈을 예금하고 출금하는 과정을 간소화시켜 상업을 촉진시킨다. 특히 아테네와 긴 성 (마크라 테이케, long walls)로 이어져있는 피레우스 항구가 활발한 무역 허브로 다시금 도약한다.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를 쓴 역사가이자 군인으로 유명한 크세노폰에 조언을 따라, 에우불로스는 서민 복지에도 힘쓴다. 에우불로스는 예산의 초과액을 국방부인 스트라티오콘보다 문화복지 기관인 테오리콘에 지출한다. 동시에 전함을 조선하고, 국경 수비대를 증원시키고, 무기를 제련하는 등 국방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아테네인에게 주어지는 칭호를 얻지 못한다.
2.2. 외정: 평화파이자 친마케도니아파
테오리콘의 수장으로써, 그는 연극을 이용한 프로파간다를 통해 친마케도니아 여론을 장착시키려고 한다.356년에 포키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 제3차 신성전쟁이 터지자, 마케도니아가 테르모필레스 협곡을 넘는 것을 꺼린 에우불로스는 스파르타와 함께 포키스를 지지한다. 에우불로스는 젊은 데모스테네스, 필로크라테스, 아이스키네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로 가서 필로크라테스 평화를 교섭한다.
그의 정권 이후 338년에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가 마케도니아한테 대패했으니, 친마케도니아 정책을 주장했던 에우불로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338년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3. 평가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점령되어 괴뢰정부가 세워지면서,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저항의 아이콘인 데모스테네스를 레지스탕스에 비교하며 추앙하고 에우불로스를 나치 협력자에 비교하면서 혐오했다.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반대파였던 데모스테네스와 리쿠르고스는 당연히 에우불로스를 싫어했지만, 경제가 활성화되고 전쟁에 지친 아테네인들이 그래도 대형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356년 제3차 신성전쟁에서 마케도니아군과 대립하긴 했지만 실질적인 육탄전은 없었다) 좋은 평가를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