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A3051><colcolor=#fecc00> 스웨덴 제 33대·39대 ·41대 재정부 장관 에른스트 요한네스 비그포르스 Ernst Johannes Wigforss | |||
출생 | 1881년 1월 24일 | ||
스웨덴 할름스타드 | |||
사망 | 1977년 1월 2일 (향년 95세) | ||
스웨덴 바스타드 | |||
재임기간 | 제33대 재정부 장관 | ||
1925년 5월 8일 ~ 1926년 7월 7일 | |||
제39대 재정부 장관 | |||
1932년 9월 24일 ~ 1936년 7월 19일 | |||
제41대 재정부 장관 | |||
1936년 9월 28일 ~ 1949년 7월 3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A3051><colcolor=#febe00> 국적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룬드 대학교 (언어학 / 박사) | ||
직업 | 장관, 국회의원, 언어학자, 사상가 | ||
정당 | }}}}}}}}} |
[clearfix]
1. 개요
스웨덴의 언어학자(방언학자)이자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핵심 인물로, 스웨덴 재정부 장관을 지냈다.비그포르스는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이 급진 혁명 노선에서 개혁 노선으로 선회하는 과정, 즉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이론가였다.
비그포르스의 이론적 관점은 페이비언 협회 및 길드사회주의의 사상으로부터 영향 받았다. 그는〈돈이 없어서 일도 못할 지경이라고?>라는 팜플렛에서 경제 하강에는 예산 삭감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당대의 자유주의 이론을 조롱했다. 혹자들은 비그포르스의 경제 정책이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비그포르스는 1932년에 재정부 장관이 되기 전부터 경제정책에 관한 논의를 폈다. 이는 케인스가『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발표한 1936년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었다. 따라서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경제학의 역사』(1991)에서 경제학은 '케인즈 혁명'보다 '스웨덴 경제 혁명'을 말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2. 유년 시절
스웨덴 남서부 할란드의 할름스타드 시에서 태어난 비그포르스는 1899년 룬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으며, 이 기간에 정치적 문제에 관한 저술을 출판했다. 그는 1913년에 홀랜드 남부 방언에 관한 학위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룬트 대학교 스칸디나비아제어 강사가 되었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는 룬트의 김나지움에서 가르쳤고, 1914년부터는 예테보리의 라틴어 김나지움에서 독일어와 스웨덴어 강의를 했다.3. 정치 경력
1919년 비그포르스는 스웨덴사회민주당으로 예테보리에서 출마, 당선되어 스웨덴 의회에 들어갔으며,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24년 얄마르 브란팅의 3번째 내각에 지명되었고, 1925년 1월 브란팅의 사임 이후에는 샌들러 내각에 참여했다. 프레드리크 토르손(Fredrik Thorsson)이 병에 걸림에 따라, 1925년 1월 24일에 임시 재정부 장관을 맡았으며, 같은 해 5월 8일 토르손이 사망하자 이를 승계했다. 샌들러 정부는 1926년 6월 7일에 물러났다.1932년부터 1949년까지 페르 알빈 한손과 타게 엘란데르 총리 내각에서 다시 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1947년의 통화 위기에서, 비그포르스는 군나르 뮈르달의 정치적으로 주요 반대자가 되었다. 스웨덴 역사가들은 이 위기를 뮈르달의 정치적 실패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역사가 아펠키스트(Orjan Appelqvist)는 비그포르스가 이 정치적 실패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통상적으로 비그포르스는 스웨덴 고세율 경제의 설계자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보다 높은 세금을 주장한 사회부 장관 구스타프 묄러와 의견 충돌을 빚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