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26 17:51:45

에른스트 디트리히 폰 부르크홀츠하우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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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이후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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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장성.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에른스트 디트리히는 1692년 10월 31일 부르홀츠하우젠의 가문 영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르홀츠하우젠 남작 게오르크 카스파와 베르테른-바이클링겐 남작부인 엘리자베스의 외아들이다. 그는 1709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해 프랑스에 대항하여 플랑드르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사부아 공자 외젠 휘하 작센 보병연대에 배속되어 소위 계급장을 획득했다. 1710년 5월 1일 투르네 요새 공방전을 치른 그는 막판에 요새 벽이 무너지자 앞장서서 돌격하여 요새 공략에 크게 기여했고 6월 27일 두아이 요새 공방전에서도 활약했다. 이후에도 여러 요새 공략에 크게 기여한 그는 연말에 중위로 승진했다. 1711년 8월 22일 부쉥 공성전에 참가한 그는 9월 14일까지 이어지는 공성전에서 용맹을 떨쳐 요새 공략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작센 연대와 함께 전투를 치르던 그는 1713년 초 군대와 함께 작센으로 귀환했다.

1715년, 작센은 대북방전쟁에 가담해 프로이센과 덴마크와 연합하여 스웨덴과 전쟁을 벌였다. 7월 12일, 25,000명의 연합군이 스웨덴군 9천명이 수비하고 있는 스트랄순트 요새를 포위했다. 이때 작센군은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폰 세켄도르프 소장의 지휘를 받았다. 디트리히는 세켄도르프의 지휘를 받으며 탁월한 기량을 선보여 중위로 승진했다. 12월23일, 스트랄순트 요새를 함락시킨 세켄도르프 소장은 이 젊은 중위의 용기와 군사적 역량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1716년, 디트리히는 세켄도르프와 함께 헝가리로 파견된 작센군에서 복무했고 1717년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야전군 원수가 된 세켄도르프를 따라 갔으며, 그해 여름 베오그라드를 포위한 사부아 공자 외젠의 군대에서 복무했다.

콰드러플 동맹 전쟁 중인 1718년, 디트리히는 세켄도르프와 함께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다. 세켄도르프는 제18 보병 연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디트리히는 그 연대의 중위를 맡았다. 이후 디트리히는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들에서 활약했는데, 특히 10월 20일 메시나 요새 공략전에서 탁월한 용맹을 떨쳐 대위로 승진했다. 1720년 5월 6일 스페인 군대의 항복을 받아내고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도로 제국의 영역으로 삼는 데 성공한 오스트리아군은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 후 디트리히는 1731년 7월 1일에 소령으로 진급했고 1733년 4월 3일에는 중령에 진급했지만 여전히 세켄도르프 장군의 부관으로 남아 있었다.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디트리히는 세켄도르프 장군이 이끄는 연대와 함게 만투아 근방에 주둔했다. 콜로르노 근교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에 참가한 그는 부상을 당했고 이 때문에 파르마와 과스탈라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할 수 없았다. 이후 회복한 디트리히는 1735년 4월 19일 대령으로 승진하여 제 35 보병대로 전출되어 비로소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738~39년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디트리히는 이 연대를 이끌어 전쟁에 가담했고, 1739년 8월 20일 소장으로 승진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오스트리아 측 야전사령관 명단에는 디트리히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741년 6월 19일 전쟁부 장관 토스카나 대공의 명령에 의해 군대에 소환된 디트리히는 같은 해 8월 26일 쾨니히세크 장군 휘하의 나이페르크 군단에 포함되었다. 이후 1742년 3월 16일, 디트리히는 오스트리아에서 적군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된 세켄도르프를 대신해 세켄도르프가 이끌었던 보병대의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그는 로트링겐 공자 카를 알렉산더의 군대에서 보병 3개 여단을 지휘했고, 5월 17일 코투지츠 전투에서 중앙에 배치된 보병대를 5개 대대를 지휘했다가 막심한 손실을 입었으며 그 역시 중상을 입었다.

1743년, 디트리히는 바이에른에서 근무하는 정찰군에 배속되었고 심바흐 전투에도 참여했다. 1744년, 디트리히는 다시 라인강 전선에 투입되었고 나이페르크 보병대와 로트링겐 보병대를 지휘했다. 그해 6월, 그의 군대는 라인 강을 건너 비셈부르크와 다른 요새들을 점령하고 알자스의 아게노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해 8월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이 또다시 보헤미아를 침공하자, 카를 알렉산더는 급히 군대를 남 보헤미아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디트리히는 10월 중순까지 보헤미아의 소베슬라브 근처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길라니 장군의 군단에서 복무했다. 길라니 장군은 당시 프로이센이 점령한 타보르를 되찾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길라니 장군은 소규모 보병대와 기병대 만을 가지고 있어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그런 상황에서도 타보르를 포위할 것을 건의했고, 길라니 장군은 이를 수락했다.

10월 19일 오전 5시, 디트리히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출격하여 10월 20일 오후 늦게 클로코티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는 척탄병 부대를 클로코티 서쪽에 배치하고 강 근 처의 마리아 성당에 600명의 부하들을 배치하고, 나머지 병력은 조르단 연못 남쪽과 서쪽에 배치했다. 이후 포대 세개를 건설하고 참호를 판 그는 10월 22일 아침 타보르 요새를 향한 포격전을 개시했다. 성벽이 무너지자, 요새 수비군 지휘관 칼네인 대령은 수비대가 안전하게 철수하는 걸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디트리히는 거부하고 포격을 재개했다. 이후 10월 23일 새벽에 야습을 개시한 그는 마침내 요새를 공략하고 1560명의 병사들을 포로로 잡고 대포 2문과 10개의 깃발, 그리고 많은 자금을 포획했다.

1745년, 디트리히는 3,300명의 선봉부대를 이끄는 발라스 장군 밑에서 복무했다. 이후 6월 4일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에 가담한 그는 전투 막판에 패퇴하는 아군의 후미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9월 30일 조르 전투에서 2개 연대를 이끌고 적지를 급습한 그는 프로이센 기병대의 역공으로 고전하던 중 한 프로이센 기병이 휘두른 사브르에 의해 두개골 일부가 절단당하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후 외과의들은 그의 두개골이 없어진 부분을 은반으로 메꾸는 데 성공했고, 그는 10월 5일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1746년 2월 부상에서 회복한 그는 야전군에 다시 합류했고, 네덜란드 마스트레히트 요새 수비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모리스 드 삭스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요새를 포위한뒤 맹공을 퍼붓자, 디트리히는 한 달간의 공성전 끝에 더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자유롭게 철수하게 해주겠다는 모리스 원수의 제안을 수락하고 요새를 양도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752년, 디트리히는 추밀원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1754년 6월 12일 대장으로 승진했으며, 1755년 10월 20일 룩셈부르크 주지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7년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룩셈부르크의 행정을 담당했다.

2.3. 7년 전쟁

1757년 6월 18일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를 따라 콜린 전투에 참가한 디트리히는 전투에서 승리한 후 상부 루사티아 궁경선을 따라 배치된 몇 개의 보병 연대 지휘를 맡았다. 이후 그는 10월 11일 바우젠에서 출격해 10월 22일까지 안드레아스 그라프 하디크 폰 푸타크 장군이 이끄는 후사르 부대가 베를린을 습격하는 걸 엄호했다. 이후 디트리히는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으며 작센의 재건을 시도했지만 프랑스군이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완패당하는 바람에 루사티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758년 봄, 프로이센군이 모라비아를 침공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디트리히를 올로무우츠 요새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디트리히는 5월 27일 요새를 포위한 적에 맞서 7월 1일까지 버텼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요새 함락에 애를 먹다가 보급마차 4천 대를 모조리 날려버린 돔슈테트 전투 직후 철수했다. 디트리히는 이 공적으로 마침내 원수로 승진했고 1758년 9월 9일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작센에서 작전 중인 본 부대로 돌아간 그는 드레스덴 수비를 맡았다. 하지만 이후로 그가 7년 전쟁에서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2.4. 이후의 경력

1760년 7월 15일 합스부르크 왕조의 귀족의 반열에 든 디트리히는 백작으로 임명되었고, 1763년 룩셈부르크로 돌아와 총독의 직무를 맡아 1766년까지 역임했다. 이후 그는 튀링겐으로 가서 여생을 보냈고 1768년 뇌졸중을 일으킨 뒤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771년 8월 31일 알텐부르크에서 사망했다. 향년 79세.그의 유해는 나움부르크 성당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