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에르네스트 리베라티 (Ernest Libérati) |
출생 | 1906년 3월 22일 |
사망 | 1983년 6월 2일 |
국적 | 프랑스 |
출신지 | 알제리[1] 오랑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라이트 |
신체조건 | 172cm / 69kg |
등번호 | -[2] |
소속팀 | 아미앵 AC (1930-1932) SC 피브 (1932-1934) 올랭피크 릴루아 (1934-1935) FC 소쇼몽벨리아르 (1935-1936) 발랑시엔 FC (1936-1937)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37-1938) |
국가대표 | 19경기 4골 (1930-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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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1. 선수 생활
지금의 알제리에 속한 오랑지방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빼면 리베라티의 어린 시절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1929년 무렵에 아미앵 AC에 합류하였고 두 차례의 쿠프 드 프랑스 준결승에서 이름을 알렸다. 비록 2차전에서 3골을 얻어맞고 결승 무대에 서기에는 실패하였지만 리베라티는 1차전에서 동점골을 넣는 활약을 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잘 나가던 아미앵 AC은 1932년 프로화가 될 때 시대에 뒤처지는 선택을 했다. 즉, 아마추어로 남은 것. 하지만 리베라티는 프로화가 된 팀에서 뛰기를 원했고 그의 선택은 SC 피브로의 이적이었다.리베라티는 SC 피브에서 팀 내 최다득점 2위에 오르는 등 SC 피브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1934년 이후로 그의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 팀 내 득점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 1935년에 다시 피브에서 쿠프 드 프랑스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미앵에서만큼 팀 성적과 개인 성적이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자 리베라티는 다시 이적을 결심하였다.
새로운 팀 소쇼에서 그는 로제 쿠르투아, 앙드레 아베글렁 등과 좋은 호흡을 맞춰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발목을 잡혔다. 그 부상 때문에 6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쿠프 드 프랑스 4강전에 출전할 기회를 잡았다. 상대는 RC 프랑스로 1929년 시즌에 아미앵 AC를 탈락시켰던 그 팀이었다. 리베라티는 복수를 노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즌을 마친 리베라티는 팀을 떠났고 2부 리그 팀이었던 발랑시엔으로 이적하였다. 발랑시엔에서는 25경기에 출전, 18골을 넣는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리베라티의 마지막 불꽃이었다.[3]
1.2. 국가대표
리베라티의 데뷔전은 포르투갈을 상대로 1930년 2월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팀은 2대0으로 패했다고 한다. 그리고 스위스를 상대로 다음 경기에서 생애 첫 A매치 득점도 기록하였다.초대 월드컵에 출전한 리베라티는 에스타디오 포시토스에서 월드컵 개막전을 치렀다. 상대는 멕시코. 그리고 전반 19분, 뤼시앵 로랑에게 올린 크로스를 로랑이 정확히 마무리를 지으며 선제골을 기록하였다. 그렇게 리베라티는 월드컵 최초의 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다음 2경기에도 출전했지만 리베라티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모두 패했고, 예선 탈락의 성적표와 함께 귀국하였다.
리베라티는 1930년대 초반 프랑스의 주요 선수 중 하나였고 그의 정확한 패스는 주된 무기 중 하나였다. 그리고 1934년 월드컵 지역예선 대 룩셈부르크전에서는 20m짜리 프리킥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본선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정확한 패스로 이름을 날렸던 아웃사이드 라이트였다.3. 수상
3.1. 클럽
- 쿠프 드 프랑스 준우승 1회: 1934(SC 피브)
[1] 리베라티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영문 위키 등에는 1938년 시즌에 리베라티가 올랭피크 마르세유에서 뛰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골키퍼 앙드레 리베라티와 혼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