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OM FRS 아서 스탠리 에딩턴 Sir Arthur Stanley Eddington | |
출생 | 1882년 12월 28일 |
잉글랜드 켄들 | |
사망 | 1944년 11월 22일 (향년 61세) |
잉글랜드 케임브리지 | |
직업 | 학자 |
분야 | 천문학, 천체물리학 |
학력 |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
지도학생 |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 |
종교 | 개신교(퀘이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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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천문학자이자, 천체물리학자. 항성의 내부 구조와 진화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검증한 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2. 천문학
외부로 가해지는 복사압과 내부로 향하는 중력이 평형을 이루는 즉, 정유체 평형을 이룰 때 별 혹은 블랙홀이 가질 수 있는 최대 광도를 계산하였다. 이를 에딩턴 광도(Eddington Luminosity) 혹은 에딩턴 한계(Eddington Limit)라고 부른다.[math(\displaystyle L_{Edd} = \frac{4 \pi G M c}{\kappa})]
여기에서 [math(G)]는 중력상수, [math(M)]은 천체의 질량, [math(c)]는 광속, [math(\kappa)]는 불투명도(opacity)다. 이 한계는 별뿐만 아니라 블랙홀에도 적용되며, 특정 질량의 블랙홀이 낼 수 있는 광도의 상한선으로서 사용된다.
이와 연관하여 별의 복사층에서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른 온도의 변화를 나타내는 미분방정식인 에딩턴의 복사평형 방정식(Eddington's Equation of Radiative Equilibrium)으로도 알려져 있다.
[math(\displaystyle\left. \dfrac{{\rm d}T}{{\rm d}r} \right|_{rad} = - \dfrac{\gamma - 1}{\gamma} \dfrac{\mu m_{H}}{k} \dfrac{Gm(r)}{r^2})]
여기에서 [math(T)]는 해당 지점에서의 온도, [math(r)]는 별의 중심으로부터 해당 지점까지의 거리, [math(\gamma)]는 등압열용량과 등적열용량의 비, [math(\mu)]는 별 내부 입자들의 평균 분자량, [math(m_{H})]는 수소의 질량, [math(G)]는 중력상수, [math(m(r))]은 해당 지점보다 별의 중심에 가까운 지점들의 총 질량이다. 이 방정식과 밀도의 정의, 정유체역학적 평형, 광도의 정의, 대류평형 방정식으로 이루어진 5개 연립미분방정식은 별의 내부를 연구하는 데에 기초가 된다.
세페이드 변광성에 대한 연구와 항성의 질량-광도 관계를 도출해낸 것 역시 유명하다.
2.1.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와의 갈등
휘하 제자 중 하나인 찬드라세카르와 블랙홀의 존재 여부에 대해 갈등을 빚었다. 찬드라세카르의 백색 왜성에 대한 연구 결과가 자연스럽게 블랙홀의 존재를 예견하는 데 이르렀으나, 에딩턴은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찬드라세카르의 연구가 전적으로 수학적인 증명이었으므로 에딩턴은 그의 연구가 실제 우주에 적용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 중 하나였던 에딩턴과의 대립으로 인해 상심한 찬드라세카르는 케임브리지를 떠났고 다시는 블랙홀을 연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밀집성에 관한 연구가 수십 년 지체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결국 에딩턴은 블랙홀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1944년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블랙홀 후보인 백조자리 X-1이 관측된 게 에딩턴 사망 후 20년도 더 지난 1970년이기 때문이다. 이후 찬드라세카르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3. 일반 상대성 이론 검증 실험
아인슈타인은 1915년에 발표한 자신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문에서, 태양 등의 거대한 천체의 중력에 의해 빛이 휠 것이라 예측하였다. 상세히 말하자면 강한 중력이 시공간을 휘게 만들고 빛은 그 휘어진 시공간을 최단거리로 진행하는데 그것이 우리 눈에는 빛이 휘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상대성 이론 문서 참조. |
"The Illustrated London News"의 삽화 1919년 11월 22일 |
3.1. 과정
1911년 프라하 카렐 대학 교수로 채용된 아인슈타인은 4월에 출판한 첫 일반 상대론 관련 논문 『빛의 진행에 대한 중력의 영향』에서 자신의 예측(중력에 의한 빛의 굴절 현상)을 검증하기 위해 개기일식을 활용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다만, 실험조건이 매우 까다로웠고 순수 이론적 목적 외에는 그만한 자금을 동원할 이유가 부족하여 아인슈타인도 상당히 간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젊은 천문학도였던 에르빈 프로인틀리히(Erwin Freundlich)가 즉각적으로 연락을 취하여 그의 이론에 대한 흥미를 드러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교수, 프로인틀리히는 천문대 조수였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편지에 크게 좋아했고 그가 편하게 연구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움을 주려 하였다. 하지만, 프로인틀리히는 개기일식 실험에 실패했다. 1914년 프로인틀리히는 겨우 원정팀과 자금을 마련하여 8월 21일에 예정되어 있던 러시아 제국 서부를 관통하는 개기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러시아로 원정을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하필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러시아에서 간첩 혐의로 억류되었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고 만다.이후에도 프로인틀리히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다가, 1920년 이후로는 학문적 견해의 충돌과 개인적 불화로 사이가 서먹해지고 1933년 미국 망명으로 인해 완전히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재능을 높이 사지는 않았으나, 1920년 이전까지(특히, 이론이 완성되기 전까지) 좋은 협력 관계였고 자신의 이론을 처음 알아준 사람이라는 점에서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사실, 1914년의 실패는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더 돋보일 좋인 기회로 바뀌었다. 1915년 말 새로 만든 중력장 방정식을 이용해 굴절값을 다시 계산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기존 계산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는 기존의 계산이 공간의 곡률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굴절 공식을 기존의 두 배인
[math(\displaystyle \frac{4GM}{c^2\Delta})]
로 고쳤으며, 태양에 의한 별빛의 각거리 이동량을 [math(1.7'')]로 수정하였다. 이후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겨우 실험을 진행할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 때쯤에는 이미 상대성 이론이 영국 등 주변 유럽의 학계에 잘 알려져 있을 시기였다. 당시는 전쟁 직후 시기라 아인슈타인이 있던 독일과 에딩턴이 있던 영국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고, 적국의 과학은 인정하지 않거나 성과를 공유하지 않는 등 과학 민족주의가 팽대해 있을 때였지만,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은 둘 다 성향이 평화주의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실험이 추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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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브랄(Sobral)에서 4인치 대물경으로 촬영된 일식 사진 (Dyson, Eddington & Davidson, 1920)[2] |
기본적인 실험 구조는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방식대로)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것으로 예측되는 시점에 태양이 지나가는 위치의 별들을 몇 개월 전 미리 밤하늘에서 촬영한 뒤,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날 그것을 다시 촬영하여 별들의 이동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1919년의 일식을 고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탓이기도 하지만) 그 때 태양 근처에 있는 별이 히아데스 성단(Hyades cluster)으로 비교적 밝았기 때문이었다.
실험 총 책임자였던 다이슨은 연구팀을 둘로 나누어 1919년 5월 29일 일식 날 (에딩턴이 소속되었던) 캠브리지 천문대(Cambridge Observatory) 팀은 아프리카 기니 만의 프린시페 섬(Principe; 현 상투메 프린시페에 속함)에서, 앤드루 크로멜린(Andrew Crommelin)이 속한 그리니치 천문대(Greenwich Observatory) 팀은 브라질 북부 소브랄에서 사진을 촬영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촬영된 건판은 소브랄 팀의 4인치 대물렌즈(4-inch object glass)와 천체사진용 대물렌즈(astrographic object glass)로 촬영된 것(각각 8장과 19장), 프린시페 팀이 촬영한 것(16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 <4인치 대물렌즈>는 가장 선명한 사진을 남겼고, 측정값은 [math(1.98 \pm 0.12)]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지지하였다.
- <프린시페 팀>은 대부분의 사진이 구름에 가렸고, 측정값은 [math(1.61 \pm 0.30)]로 <4인치 대물경>에 비해 정확도와 반영 비중이 약간 떨어졌다. 이 역시 일반 상대성 이론에 가까운 값이다.
- <천체사진용 대물렌즈>는 당초에 가장 결과가 좋을 것으로 예상되어 사진도 가장 많이 찍었으나, 실제 사진은 전부 산란되고 초점이 흔들려서 분석에서 거의 배제되었다. 값 자체는 [math(0.93'')]로 고전 역학의 예측과 가까웠다.
다이슨 관측팀은 오차를 고려하여 <4인치 대물경>에 가장 비중을 두었고, 최종적으로 일반 상대성 이론이 더 실험값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관측된 별의 각거리 이동량은 얇은 선으로 정리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값은 굵은 선, 뉴턴의 이론값은 점선이다. (Dyson, Eddington & Davidson, 1920) |
이 관측 결과는 1919년 11월 6월 런던에서 열린 왕립 학회(Royal Society)와 왕립 천문 학회(Royal Astronomical Society) 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검토되었고, 공식적으로 아인슈타인 이론의 승리를 인정하였다.
이제 나는 이 중대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논의를 촉구한다. 만약 이 결과가 오로지 중력에 의해 빛이 꺾이는 것만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사실, 뉴턴은 이미 그의 "광학(Optics)"의 첫 질문에서 동일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아마도 현재 값의 절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과는 고립된 것이 아니며, 물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에 영향을 끼치는 과학적 발상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대륙의 일부이다. (...) 이것은 뉴턴 이후 우리가 중력 이론과 관련하여 얻은 가장 중요한 결과이다. (...)
아인슈타인과 뉴턴의 중력 법칙의 차이는 특수한 경우에서만 발생한다. 아인슈타인 이론에 대한 진정한 관심사는 그 결과보다는 그것을 얻는 방법에 있다. 그의 이론이 옳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중력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아인슈타인의 추론이 옳다는 것이 앞으로도 유지된다면 - 이미, 수성의 세차운동과 지금의 일식과 관련한 매우 혹독한 두 시험을 통과하였다 - 이는 인간 사유(Human Thought) 사상 최고의 성취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 이론의 약점은 수식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불변량 이론(theory of invariants)과 변분학(calculus of variations)에 대한 상당 수준의 지식이 있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이 새로운 중력 법칙을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조지프 존 톰슨(J.J.Thomson), 왕립 학회 42대 회장(1915~1920)의 평가[3]
아인슈타인과 뉴턴의 중력 법칙의 차이는 특수한 경우에서만 발생한다. 아인슈타인 이론에 대한 진정한 관심사는 그 결과보다는 그것을 얻는 방법에 있다. 그의 이론이 옳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중력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아인슈타인의 추론이 옳다는 것이 앞으로도 유지된다면 - 이미, 수성의 세차운동과 지금의 일식과 관련한 매우 혹독한 두 시험을 통과하였다 - 이는 인간 사유(Human Thought) 사상 최고의 성취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 이론의 약점은 수식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불변량 이론(theory of invariants)과 변분학(calculus of variations)에 대한 상당 수준의 지식이 있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이 새로운 중력 법칙을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조지프 존 톰슨(J.J.Thomson), 왕립 학회 42대 회장(1915~1920)의 평가[3]
과학계는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고전 물리학을 상징하는 뉴턴의 이론의 마지막 온기를 담은 중력마저 새로운 물리학에 의해 대체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사건은 그간 물리학을 지배했던 영국의 뉴턴이 자신이 몸담았던 영국의 왕립 학회에서 독일의 아인슈타인에게 왕좌를 물려준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크게 상처입은 양국에 화해 및 평화의 메시지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919년 11월 7일 런던 타임즈 기사 | 1919년 11월 10일 뉴욕 타임즈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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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혁명. 우주의 새로운 이론. 뉴턴의 학설이 무너지다. | 빛은 하늘에서 모두 삐딱하다 아인슈타인 이론이 승리하다 12명의 현자를 위한 책 |
뉴욕 타임즈 기사의 마지막 문구는, 당시 왕립 학회장이던 톰슨의 평가처럼 일반 상대성 이론이 그만큼 물리학계 내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직접 한 말은 아니다.) 이듬해에 당시 아인슈타인과 함께 상대성 이론을 창시한 물리학자로 알려진 로런츠가 전체 상대성 이론에 대해 저술한 해설서의 서두에는 이런 언급이 있다.
(출판사 서문)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이 전세계에 12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대성 이론에 관하여 격렬하게 토론이 오가는 이 주제의 정보에 대한 지속적인 요청이 있다는 건 사실이다. (...)
(저자 서문) 11월 6일 런던에서 열린 왕립 학회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의 "상대성 이론"을 인정한 것은 대서양 양안의 과학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그의 이론을 제기한 것은 거의 15년 전이다. 현재 그의 이론에 대한 관심이 재개된 것은, 최근 태양 근처를 통과하는 광선의 경로가 영향을 받는지 확인하기 위해 5월 말의 개기일식 때에 수행된 관측 보고서에서 그의 이론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
로런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The Einstein Theory of Relativity), 1920 wikisource
(저자 서문) 11월 6일 런던에서 열린 왕립 학회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의 "상대성 이론"을 인정한 것은 대서양 양안의 과학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그의 이론을 제기한 것은 거의 15년 전이다. 현재 그의 이론에 대한 관심이 재개된 것은, 최근 태양 근처를 통과하는 광선의 경로가 영향을 받는지 확인하기 위해 5월 말의 개기일식 때에 수행된 관측 보고서에서 그의 이론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
로런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The Einstein Theory of Relativity), 1920 wikisource
3.2. 논란?
뒷 이야기로, 이후 소브랄에서 사용한 두 망원경 중 하나의 결과를 통째로 버린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의견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상 자체가 완전히 왜곡되어서 버린 것이지만, 당시 분석으로는 뉴턴 역학의 값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에 (모두 관측 보고서에 그대로 언급된 사항이다.)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사실 이 때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을 당연히 일반 상대론으로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음에도추천 목록. 1921년 노벨상 위원회에서 일반 상대론으로 노벨상을 주지 못한 것은 이 결과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반유대주의가 거세지는 시기와도 맞물려 있다). 그리고, 이후에도 한동안은 에딩턴의 실험 이상의 정확도를 보여주는 실험이 나오지 못했던 것도 이의 제기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 이 때문에 아직까지 에딩턴 실험이 부정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사실 1979년 개선된 장비로 건판을 재검증한 결과 에딩턴의 분석이 옳았던 것으로 최종 판정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에딩턴 실험보다 훨씬 높은 정확도로 빛의 굴절량이 증명된다. 이에 따르면, <4인치 대물경>의 경우 기존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math(1.98 \pm 0.18)] → [math(1.90 \pm 0.11)]) <천체사진용 대물경>은 수치가 크게 달라져 [math(0.93'')](큰 오차)에서 [math(1.55 \pm 0.34)]로 수정되었다. 오차를 고려하여 둘을 종합하면 [math(1.87 \pm 0.13)]로, 이는 아인슈타인의 예측값([math(1.75'')])에 가까운 수치이다.[4][1] Matthew Stanley, Practical Mystic Religion, Science, and A. S. Eddingt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7), #.[2] F.W.Dyson, A.S.Eddington & C.Davidson, 1920, "A Determination of the Deflection of Light by the Sun's Gravitational Field, from Observations Made at the Total Eclipse of May 29, 1919", Phil.Trans.R.Soc.Lond.A1920 220#[3] The Observatory, A Monthly review of astronomy. Vol.42, No.545. p. 394 (1919.11.) #[4] G. M. Harvey, ‘Gravitational deflection of light: a re-examination of the observations of the solar eclipse of 1919’, Observatory 99, 195 (19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