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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31대 토사 반조천자 양응룡 | 楊應龍 | |
<colbgcolor=#000000> 존호 | 반조천자(半朝天子) |
성씨 | 양(楊) |
휘 | 응룡(應龍) |
부친 | 양렬(楊烈) |
모친 | 불명 |
정실 | 장씨(張氏, ? ~ 1586)[1] |
생몰 | 1551년 ~ 1600년 |
재위 | 파주 31대 토사 |
1572년 ~ 1600년 | |
반조천자 | |
1596년 ~ 1600년 |
1. 개요
楊應龍1551년 ~ 1600년
중국 명나라 시기의 인물로 파주(播州) 지역의 통치권 세습을 허락받아온 토사(土司) 출신 이민족이었다. 양응룡 본인 역시 토사를 지냈으며 전임 토사인 양렬(楊烈)의 아들로 명 조정으로부터 세습권을 인정받아왔으나 여러 갈등이 생긴 결과 반란을 일으켰고 끝내 실패해 자살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가 일으킨 난을 '양응룡의 난'이라 칭하는데, 이 사건은 명나라가 서남부 지역을 토착 세력에게 지배권을 일부 분할해 간접 통치를 시행한다는 '기미 정책'을 폐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명나라의 중앙 통치력을 강화하게끔 하였다.
2. 생애
전임 토사이자 부친인 양렬이 1572년 사망하자 그 지위를 계승했으며 1573년 만력제가 즉위하자 말과 양을 보내고 만력제의 생신엔 귀중한 자원들을 보내고 그 답례로 고위 관료만이 입을 수 있는 의복[2]을 받은데다 도지휘사(督指揮使)라는 관직을 받아 명 관리로 인정받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던 중, 1587년 9월, 영녕(寧領) 지역의 토사인 사세통(奢世統), 사세속(奢世續)이 일으킨 봉기에 양응룡이 연루되었다는[3] 내용이 만력제에게 전해졌고, 잠시동안 양응룡은 의심을 샀으나 곧 명군을 도와 그 반란군을 진압했기에 의혹을 떨치고 신뢰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그러나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반란을 진압한 것이 아니였고 진압 과정에서 쌓아올린 자신의 입지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는데 이것을 파주 휘하 부하들이 "양응룡은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로 해석하여 명 조정에게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저러한 고발이 진행되던 중 1586년, 양응룡이 자신의 정실 부인 장씨(張氏)를 살해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는데 문제는 당시 토사의 부인은 명나라의 정식 관리(공무원)으로 인정받던 직위였던 것이다. 즉 양응룡은 명 조정을 거스른 것이 되었고 결국 1593년 만력제는 양응룡에게 사형을 선고,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때마침 그때는 임진왜란이 진행중이였기에 군비가 부족했던 명나라에게 양응룡은 백은 2만 냥을 헌납하고 5천 군사와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쳐 사면되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1593년 10월 철수했기에 사면만 되고 5천 군사는 지원할 필요가 없어져 결과적으론 양응룡만 이득을 본 셈이 되버렸다.
어쨌든 양응룡은 그전처럼 파주에서 폭정을 저질렀고 명 조정을 기만한 셈이 되었지만 처벌할 명분이 없어 지켜보던 와중, 세금 착취를 명분으로 명 조정은 본격적인 양응룡 토벌 작전을 개시하게 된다. 명 조정은 초반에는 파주군에게 패배, 양응룡의 반란 혐의를 취소하고 금을 받는 조건으로 파주 토사 지위를 유지시켜 줬으나 양응룡은 볼모로 잡힌 자신의 아들 양가동(楊可棟, ? ~ 1596)이 명에서 죽자 급격히 분노하며 '반조천자(半朝天子)'를 참칭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1599년, 정유재란을 종결한 명은 다시금 세태를 회복하여 대대적인 '파주 진압 작전'을 재개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명군은 서양식 대포를 채용했기에 그 전과 달리 파주군에게 밀리지 않았으며 낙후된 무기만으로 무장한 파주군은 파죽지세로 토벌당했으며 마침내 파주 최후의 지역인 해룡둔(海龍屯)까지 점령하여 파주 진압 작전은 명나라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패배를 직감한 양응룡은 자신의 애첩 두명과 자결했으며 그와 그 가족들의 시신은 베이징으로 운송되어 능지처참 및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후 파주는 명나라의 직속 통치 구역으로 귀속되었다.
3. 가족
- 부친: 양렬(楊烈)
- 모친: 불명
- 부인: 장씨(張氏)
- 아들: 양가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