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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야 투레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2. 커리어 초기
13살 때인 1996년, ASEC 미모사의 유소년 코치인 패트릭 레이엔담(Patrick van Reijendam)의 권유로 축구를 처음 접해본 후 5년간 ASEC 미모사에서 유소년 생활을 했다. 그 후 18살 때인, 2001년 AESC 미모사와 연계되어 있던 벨기에 주필러리그의 KSK 베베런으로 이적해 데뷔하며 유럽에 발을 딛게 된다. 당시 KSK 베베런은 감독이었던 장마르크 기유(Jean-Marc Guillou)[1]의 영향으로 ASEC 미모사와 연계하여 코트디부아르의 유망주들을 대거 영입하는 정책을 쓰고 있었는데 한때 17명의 코트디부아르 선수가 스쿼드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야야 투레와 같은 길을 걸은 선수들로 에마뉘엘 에부에, 제르비뉴 등이 있다.[2]KSK 베베런에서 두 시즌 동안 70경기를 뛰며 활약했으나 2003년에 팀이 재정난에 빠지며 선수단을 정리해야하는 상황이 되면서 야야 투레는 새 팀을 찾아야 했다. 이때 친형인 콜로 투레가 아스날 FC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형의 권유로 아스날에서 두 달 정도 훈련을 받으며 입단 테스트를 받기로 한다. 그렇게 아스날의 유니폼을 입고 바넷 FC과 연습 경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아스날의 감독이었던 아르센 벵거가 야야 투레의 재능을 알아보고 영입을 시도한다. 야야 투레 역시 아스날에 입단하기로 합의했지만 비유럽계 선수들에게 악명 높은 워크퍼밋 발급이 지연되면서[3] 영입까진 성사되지 못하고 결국 뛸 팀을 찾아 우크라이나의 FC 메탈루르흐 도네츠크로 이적해 1년 반을 뛴다.
나중에 야야 투레가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해 맹활약하자 벵거는 2003년에 야야 투레를 영입하지 못한 것이 그에게도 큰 후회로 남아있다며 당시 야야 투레도 아스날과 계약하기로 합의했고 그도 야야 투레를 원했지만 워크퍼밋 때문에 이적이 계속 지연되자 야야 투레는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아스날에 입단하기 보다는 당장 뛰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선택했다며 아쉬워했다.
한편 아스날에서 훈련할 당시 야야 투레는 미드필더로 몇 번 뛰다가 공격수로 기용되자 파트리크 비에라처럼 할 수 있다며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바꿔달라고 했는데 벵거는 비에라처럼 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계속 공격수로 썼다고 술회했다
코트디부아르 대표로 2006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한 후 투레는 2006년 8월 프랑스 리그 1의 AS 모나코에 입단하였다. 모나코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야야 투레는 다시 또 많은 클럽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1,000만 유로의 이적료로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하게 된다.
3. FC 바르셀로나
{{{#ffd400 118경기 6골 8도움}}} |
4. 맨체스터 시티 FC
316경기 82골 46도움 |
5. 올림피아코스 복귀
2018년 9월 2일 올림피아코스의 야야 투레 영입 오피셜이 발표되었다. AS 모나코 이적 전[5]에 뛰었던 친정팀으로의 귀환이다.허나 같은 해 12월 12일, 계약이 해지되었다. 3개월만에 팀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경기력이 감독의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카이스포츠의 보도에 따르면 투레의 계약은 출전한 경기수에 따라 임금이 지급되는 방식이었는데, 올림피아코스의 재정이 불안정해서 감당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3개월 동안 단 5경기 출전에 그쳤다.
6. 은퇴?
에이전트 피셜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고 밝혔다. 은퇴 후에는 코치나 감독쪽으로 가려는 생각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선수 본인이 이틀만에 방송에 나와서 은퇴 선언을 부정했다. 코칭 준비를 하고 있는건 사실이지만 새 팀을 계속 찾고 있다고 한다. 만약 은퇴를 한다면 에이전트의 입이 아니라 본인의 입으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트러블메이커였던 에이전트 드미트리 셀룩과 마침내 결별했다. 에이전트 주장으로는 두 사람 사이가 갈라진 첫 시작이 16-17 시즌에 있었던 펩 과르디올라와의 갈등에서 투레와 셀룩의 입장 차이였다고 한다.[6]
맨시티의 18-19 시즌 마지막 브라이튼 원정경기에 스카이스포츠 패널 자격으로 경기장을 찾았고 맨시티의 우승이 확정되자 선수들과 함께 우승을 축하했다.
그리고 새로운 에이전트와 함께 현역 연장을 할 곳을 물색하더니...
7. 칭다오 황하이
亚亚图雷[7] |
7월 21일 신장 톈산과의 갑급 리그 경기에 원정에 처음 출장했고 75분경 중국리그 데뷔골을 넣었다. 칭다오의 5-2 승리.
연초에 몸담았던 올림피아코스에서 거의 개점휴업 상태라서 먹튀가 예상되었으나, 예상외로 칭다오에서는 거의 매경기 풀타임 활약하면서 2골 3도움으로 팀의 중국 갑급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다만 팀이 승격한 후에도 계속 머물지는 불명.
11월 2일 프로커리어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 난퉁 즈윈과의 최종전에서 경기 시작하자마자 상대선수를 걷어 찼다가 레드카드를 받는 굴욕을 당했다. 팀은 1-2로 졌지만, 승점 1점차로 뒤쫓던 2위팀 구이저우 헝펑 즈청도 졌기 때문에 그대로 우승 확정. 여담이지만 구이저우는 3위로 쳐지고 최종전에 승리한 3위팀 스자좡 융창이 2위를 마크해 다음해 중국 슈퍼 리그로 승격한다.
다만 투레의 나이를 봐서 계약은 연장하지 않았고 야야 투레는 일단 칭다오 황하이를 마지막으로 현역을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계약 종료 이후 잉글랜드 4부리그인 레이튼 오리엔트에서 훈련을 했지만 2021년 1월 22일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
[1]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출신으로 1993년부터 2000년까지 ASEC 미모사의 단장을 했다. 2000년에는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겸임했다.[2] 이 선수들은 훗날 아스날로 이적하는데 이 역시 장마르크 기유 때문이다. 1983년에 아르센 벵거가 처음 코치 생활을 시작한 팀이 기유가 감독으로 있던 AS 칸이었다.[3] 형인 콜로 투레는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고 있었기 때문에 2002년에 아스날이 무난하게 영입할 수 있었지만 야야 투레는 아직 국가대표팀에는 발탁되지 않고 있었다.[4] 2014년 3월 올림피아코스와 맨유가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대결했을 때 친정팀 올림피아코스를 응원하기 위해 올드 트래포드를 방문하기도 했다.# 다만 올림피아코스는 역전패로 탈락(...)하였다.[5] 2005~2006년[6] 16-17 시즌의 펩 과르디올라와의 설전이 투레가 동의 한 것인지, 셀룩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쪽이든 간에 셀룩이 선을 크게 넘어버려 투레가 몇달동안이나 1군 경기에서 추방되었었다. 투레가 1군 복귀를 위해 수습을 시도한 뒤에도 에이전트는 본인은 펩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다고 언론플레이를 했으니 투레 본인도 에이전트에게 화가 났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다.[7] 야야 투레의 한자명이며 표준 중국어로는 "야야투레이"라고 읽히며, 한국한자음으로는 "아아도뢰"라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