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1 10:57:14

Alan Fr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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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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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앨런 프리드
ALAN FREED
헌액 부문 아멧 어터건 상[1] (Ahmet Ertegun Award)
멤버 (개인 자격)
입성 연도 1986년 }}}}}}}}}
<colbgcolor=#666><colcolor=#fff> 앨런 프리드
Alan Freed
파일:Alan_Freed_disk_jockey.jpg
본명 앨버트 제임스 프리드
Albert James Freed
출생 1921년 12월 15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윈드버
사망 1965년 1월 20일 (향년 43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팜스프링스
직업 디스크자키
활동 1945년 ~ 1965년
배우자 베티 루 빈 (1943년 ~ 1949년, 이혼)
마조리 J. 헤스 (1950년 ~ 1958년, 이혼)
잉가 릴 보울링 (1959년 결혼)
자녀 4명
링크 공식 사이트

1. 개요2. 상세
2.1. 로큰롤을 널리 퍼트리다2.2. 1959년 페이올라 사태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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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라디오 DJ.

2. 상세

2.1. 로큰롤을 널리 퍼트리다

이 사람은 로큰롤 음악의 인기에 크게 공헌했다. 1950년대 초반, 차별받던 미국 흑인들의 음악이었던 리듬 앤 블루스가 더 빨라져 로큰롤로 변화하고 있었는데 당시 미국 흑인들은 민권법도 없이,[2] 인권도 없이 차별받고 있었지만 백인 10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발전하고 안정된 사회에서 자라다 보니, 재즈나 스탠더드 팝(트레디셔널 팝)을 듣던 자신들의 기성세대와 차별화되고 싶었다.

그래서 이들은 흑인 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그에 맞추어 1952년부터 시작된 앨런 프리드의 라디오 방송은, 미국 청소년들에게 최신 리듬 앤 블루스 곡들과 로큰롤 곡들을 퍼뜨렸다. 이게 계속되다 보니 1955년쯤 접어들면 백인 청소년들은 흑인 음악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으며 빌 헤일리의 "Rock Around The Clock"의 대히트는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음악을 영원히 바꿔 버렸다. 빌보드나 다른 음악 잡지들은 이 노래 이후부터 2020년 현재까지, 록 시대(Rock Era)라는 음악 시대로 분류한다. 말 그대로 록 음악의 시대라는 뜻이다.

이에 크게 공헌한 이가 앨런 프리드이다. 당시 앨런 프리드의 이러한 공로로 백인을 대상으로 하는 음반사들은, 백인 청소년의 구매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흑인처럼 노래하는 백인 있으면 게임 끝난다"라는 인식이 퍼졌는데, 그 인식의 결과물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이다. 엘비스의 창법은 확실히 미국 흑인들의 리듬 앤 블루스 음악과 로큰롤 음악에서 온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음악 세계를 바꾸는데 큰 기여를 한 앨런 프리드였지만, 끝은 아주 불행했는데 그 이유는 1959년 발생한 페이올라 사태.

2.2. 1959년 페이올라 사태

앨런 프리드가 음반사로부터 돈을 받고 특정 락앤롤 곡들을 틀어줬다는 의혹으로 앨런 프리드의 커리어와 명성은 한 순간에 날아가게 되었으며, 안 그래도 엘비스의 입대, 제리 리 루이스의 미성년자 사촌과의 결혼, 척 베리의 체포 [3], 리틀 리처드의 목사 안수, 또 같은 해 2월 발생한 비행기 사고[4]로 락앤롤 음악의 전성기가 빠르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 페이올라 사건은 미국에서 락앤롤의 종말을 알리고, 락앤롤 정신은 사라지고 그 음악만 남아, 1960년대 처비 체커를 필두로 한 트위스트 등의 댄스 음악 열풍 (락앤롤과 R&B 기반 댄스 음악이었다.), 서프 음악, 걸그룹 음악[5], 또는 락앤롤이 백인식으로 몇 번 탈색된 60년대 초반식 팝 음악 등이 비틀즈를 필두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 전까지 미국 음악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프리드는 몇몇 지방 라디오 방송국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려 했지만 이미 명성이 나락으로 떨어진 탓에[6] 쉽게 일자리를 얻지 못했고, 그나마 얻은 일자리도 알코올 의존증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 못한데다가 1964년에는 탈세 혐의로 재판까지 받았다. 결국 1965년 1월 20일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

3. 관련 문서



[1] 이전 명칭은 비공연자((Non-performers)[2] 민권법은 1964년 제정된다. 자세한 내용은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 문서 참조.[3] 다만 이건 인종차별적인 이유가 어느 정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민권법은 제정 계획조차 없던 시기였다. 미국 흑인들의 인권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던 때이다.[4] The Day The Music Died(음악이 죽은 날)이라고 불리는 날이며, 락앤롤 스타 빅 파퍼, 라밤바와 Donna로 유명한 리치 발렌스, 그리고 당시 최고의 틴 아이돌 가수였으며, 비틀즈의 제일 큰 우상 중 하나였던 버디 홀리가 타고 있던 경비행기가 추락하며 이들 모두가 사망했다. 이 사고의 충격은 1972년 대히트했던 돈 매클레인의 "American Pie"의 가사에서 알 수 있다.[5] 팝 또는 두왑, 또는 R&B 기반의 음악. 1961년 흑인 R&B 걸그룹 The Shirelles의 대성공으로 시작된 붐으로 다이애나 로스슈프림스 역시 이 시대에 데뷔했다. 인기는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에 얻었지만.[6] 페이올라 외에도 가수들의 곡에 억지로 공동 작곡자로 이름을 올린 다음 본인의 프로그램에서 프로모션을 돌리는 식으로 이중으로 돈을 받아 챙기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척 베리Maybelle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