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0:21:14

암바팔리

  • 팔리어: Ambapālī
  • 산스크리트어: Āmrapālī
  • 한자음역 : 菴摩羅、菴没羅 등, 의역: 㮈女、柰女、非浄護 등.
  • 한국어 : 암바팔리

1. 개요2. 생애

1. 개요

석가모니의 여성 재가제자(우바이)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녀로써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훗날 석가모니 부처에게 귀의해 부처에게 자신이 소유한 망고나무 밭을 기증하여 암라수원정사(菴羅樹園精舎)라는 이름의 사원으로 바꾸었다. 천한 유녀로 알려졌으나 훗날 종교에 귀의해 성인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마리아 막달레나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1]

불경 가운데 하나인 불설내녀기역인연경(佛說㮈女祇域因緣經)[2]은 암바팔리의 일생과 그녀가 어떻게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내력을 소개하고 있다.

2. 생애

불설내녀기역인연경에 따르면 암바팔리는 전생에 바라내국(波羅㮈國)이라는 나라의 가난한 여인이었으며, 설법을 행하는 가섭불을 위해 남의 과수원에 가서 보시할 과일을 구걸해 사과 하나를 겨우 얻어다 물과 함께 가섭불에게 바쳤다. 이러한 인연으로 훗날 이 가난한 여인은 천상의 왕후로 태어났는데, 석가모니 부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날 때에는 유야리국(維耶梨國)이라는 나라의 국왕의 동산에 자란 사과나무[㮈樹]에 열린 열매로부터 태어났다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또는 바이샬리(毘舎離) 사람으로 바이샤 출신이었지만 어려서 바이샬리 성밖의 망고 숲에 버려져서 그곳 관리인에 의해 길러졌는데, '암바팔리'라는 이름도 즉 '망고 숲 관리인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암바팔리는 나이 열다섯에 재색을 겸비한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라났고, 먼 마을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서 남전불교의 경전인 《마하박가》(대품大品)에는 그녀의 미모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들어 바이샬리 성내가 축축해졌다고 한다. 심지어 주변 일곱 나라의 왕들이 모두 그녀에게 구혼하겠다며 와서 서로 전쟁까지 벌이게 되었다. 이에 암바팔리는 "제가 만약 한 왕자를 고르면 다른 왕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차지하지 못한 왕자는 자신의 권위가 흔들렸다고 생각하여 분노할 것이고 왕자들의 분노는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차라리 저는 모두의 여인이 되고 누구의 여인도 되지 않겠습니다."라며 자청해서 유녀가 되었다고 한다.[3] 유녀가 된 뒤에도 암바팔리는 미모나 성격뿐 아니라 춤, 노래, 음악에도 뛰어나서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무대를 돌며 막대한 돈을 벌었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経)에는 릿차비족(이차족離車族)의 공자들보다 먼저 석가모니 부처를 초대하였는데, 이들 공자들이 암바팔리에게 "수만 냥의 금화를 줄 테니 제발 석가모니 부처를 우리들이 초대할 수 있게 해 주오"고 청했으나 암바팔리는 난처해하며 "수만 냥이 아니라 바이샬리 전역을 모두 준다고 해도 이미 석가께서 수락하신 이상 함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고 대답했고, 이들은 다시 석가모니 부처를 찾아가 "우리 모두 당신을 흠모합니다. 부디 공양을 모레로 미루어줄 수 없겠습니까"고 물었지만 석가모니 부처도 난처해하며 "이미 수락하였으니 번복할 수 없네, 정말 미안하네"고 대답했다. 결국 공자들은 망연하게 석가를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암바팔리는 석가모니 부처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망고 숲인 암마라수원(菴摩羅樹苑)을 석가모니 부처의 교단에 기증하였다. 이곳이 훗날 천축 5대 정사(天竺五精舎)의 하나인 암마수원정사이다.

《장로니게주》(長老尼偈註, ThigA.206-7)에 따르면 출가해서 고명한 장로가 된 자신의 아들 비마라와 콘단야의 설법을 듣고 그녀 자신도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고, 아라한과(阿羅漢果)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 흔히 유녀(창녀)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창녀가 아니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점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비슷하다.[2] 후한 때에 안식국(파르티아) 출신의 승려인 안세고(安世高)가 한역하였다.[3] 다만 불설내녀기역인연경에 따르면 일곱 왕자 가운데 한 명의 왕자와 하룻밤을 보냈고 이에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기역'이라고 지었으며, 기역은 훗날 의사로써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