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08 01:58:50

안동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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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주요 성씨
1.1. 개요1.2. 선先 안동 김씨
1.2.1. 출신 인물
1.3. 신 안동 김씨
1.3.1. 출신 인물
1.3.1.1. 조선시대 인물
1.3.1.1.1. 세도 정치 기간의 인물
1.3.1.2. 근, 현대 인물1.3.1.3. 장동(壯洞) 김씨와 세도정치
1.4. 관련 항목
2. 카툰연재 갤러리의 만화가

1. 한국의 주요 성씨

1.1. 개요

安東 金氏.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를 본관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성씨 집단.
주로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에서 찾아보기 쉬우며 김해, 경주와 함께 김씨 전체에서 상위 비율에 속한다. 단, 안동 김씨는 혈연관계가 없는 두 집안을 한꺼번에 가리키므로 인구수는 자세히 보아야 한다.

조선붕당 세력이나 세도정치로 유명한 건 신新 안동 김씨, 그 중에서도 장동 김씨다.

본관이 같은 두 집안은 선(先) 안동 김씨(혹은 구(舊) 안동 김씨)와 후(後) 안동 김씨(혹은 신(新) 안동 김씨)로 나뉜다. 이 둘은 서로 혈연적 관계가 없는 가문이다.[1] 2003년 기준으로 선 안동 김씨의 인구는 425,264명이며 신 안동 김씨 인구는 47,702명이다. 그 중에서도 흔히 세도정치로 유명한 장동 김씨(김상헌, 김상용 후손)의 인구는 약5000명이다. 확인 바람

1.2. 선先 안동 김씨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을 시조로 하는 안동 김씨. 몽골과의 전쟁과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맹활약한 고려의 명장 김방경이 중시조이다.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을 탄핵하고 고려가 망하자 첩첩산중에 은거한 충신 김사렴과 김사렴의 아우이자 조선 왕조 개국공신 1순위인 김사형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진주 대첩김시민 목사, 강홍립이 이끌고 출정했던 후금 정벌군의 전선 지휘관으로 훗날 명나라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는 김응하 등도 모두 선 안동 김씨다. 김시민, 김응하는 모두 충무공의 시호를 받았다.[2] 현재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선 안동 김씨는 김구다.

선 안동 김씨는 조선 중기 이후 몰락에 가까운 위기에 처한다, 그 모든 중심에는 김자점이 있다. 김자점은 1623년 3월(광해군 재위 15년)에 이괄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 6품직에 오른다.(나중에 다시 승정원동부승지로 특별승진) 후일 병자호란때 도원수가 되어 토산 전투에서 대패하자 삭탈관직 당하고(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함) 호란이 끝난 뒤 조야의 처벌 요구로 유배당한다. 그러나 김자점은 1639년(인조 17년) 사면되고 1640년(인조 18년) 복직된다. 하지만 효종 때 산당 세력에게 탄핵당해 1650년 파직되고 강원도 홍천으로 유배당한다. 이에 앙심을 품고 청나라한테 효종이 청나라를 적대시하는 북벌론을 지지하고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한다며 밀고하여 나라에 큰 혼란을 불러오게되는데, 다행히도 이경석, 이시백 등의 활약으로 청나라 군대를 돌려보낸다. 이후 김자점은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당하지만 그 후에도 손자며느리인 효명옹주 저주사건, 아들과 손자들의 군사반란이 발각되면서 아들, 손자들과 함께 역모로 몰려 사형당하고 가문은 몰락한다(...) 임시 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 가 김자점의 방계 후손인데, 백범 일지에서 집안이 상놈의 패를 찼다(...)고 언급하는 사건이 이 것이다.

그러나 김자점 이후에도 좌승지 김구만(龜萬), 삼도수군통제사 김영적(永績), 도승지, 병조참판을 역임한 김광국(光國) 등이 있는 것을 보면 김자점의 정치적 몰락으로 인해 벼슬길이 막혔다거나 집안이 몰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3] 오히려 이후 신 안동 김의 의한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의 모든 정치, 사회 기능이 난장판이 될 때 그 여파로 인해 정치 중심에서 밀려났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이후 수 많은 사대부들이 문란한 정치판에 실망하여 통치체제 자체에 불만을 갖게 됐으며, 이는 이후 흥선대원군이 순식간에 권력의 중심에 오르는 배경이 된다.

1.2.1. 출신 인물

1.3. 신 안동 김씨[6]

고려의 호족 개국 공신 김선평을 시조로 한다.(고창 전투에 큰 공을 세운 삼태사 중 일원.)

그 이후 별 인물이 없다가 인조 때 청서파로 김상헌, 김상용 형제가 나타나면서 관운을 타게 된다. 후손 중에서 김조순이 드디어 왕실의 외척으로 등장하면서 세도 정치로 이름을 날리며, 흥선대원군이 등장하기 전까지 약 60년간 세도를 누린다.

이에 힘입어 신 안동 김씨는 조선 시대 정치가의 최고 영예인 종묘 배향공신을 무려 6명이나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밖에도 15명의 정승, 6명의 대제학, 청백리 1명, 9명의 대장, 3명의 왕비(순조순원왕후, 헌종효현왕후, 철종철인왕후)가 나왔다. 장동 김씨라고도 불리우는 이 신 안동 김씨는 일찍이 한양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은 탓에 한양 양반 즉 경반(京班)으로 분류되며, 실제로 경북과 안동지역의 안동 김씨는 선 안동 김씨가 대부분이다.

신 안동 김씨로 유명한 인물로 김상헌, 김상용, 김조순, 김삿갓, 김옥균, 김좌진, 김두한 등이 있다. 현대에는 특이하게 야구계에서 인물이 많이 나온다. 또한 축구선수 박지성 부인 김민지 전 SBS 아나운서가 장동 김씨로 김상헌, 김상용 직계 후손이다.

숙종 조에 척화파의 거두로 좌의정까지 올랐던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흥과 김수항이 영의정에 오르고, 후에 수항의 아들 김창집도 영의정이 되었다. 단, 이들은 모두 정쟁에 휘말려 유배지에서 사망 혹은 사사되었다. 이후 다시 복귀하게 되는 것은 순조 대의 세도정치. 철종 대로 가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 정승이 모두 후 안동 김씨였던 적도 있었다. 김조순 이래 순(淳), 근(根), 병(炳)자 항렬로 내려오면서 '조선 팔도에 벼슬하지 않은 안동 김씨가 없었다.' 란 말도 나왔다.[7]위에서 보듯 이 시기의 왕비는 죄다 안동 김씨다. 신정왕후 조씨는 원래 효명세자빈이었고...

참고로 김씨 성에 이름 끝에 "동(東)" "현(顯)" "년(年)" "일(鎰)"자가 들어가 있으면 거의 99% 신 안동 김씨라 보면 된다.

1.3.1. 출신 인물

1.3.1.1. 조선시대 인물
  • 김번 : 조선 중기 세자시강원 문학, 평양 서윤 역임. 김상헌의 중조부.
  • 김극효 : 조선 중기 동지돈녕부사 돈녕부도정 역임. 청음 김상헌의 부.
  • 김상용 : 조선 중기의 관료이자 시인 우의정.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 청음 김상헌의 형.
  • 김상헌 : 조선 중기의 관료로 대표적인 척화파. 청음 석실산인 서간노인 예조 판서 좌의정 역임. 김상용의 동생.
  • 김조순 : 조선 후기 정치인이자 순조의 장인. 세도 정치의 시작을 알린 인물. 22세 '순(淳)'자 항렬.[8]
  • 순원왕후 : 순조의 정후. 23세 '근(根)'자 항렬.
  • 김좌근 : 조선 후기 정치인이자 순원왕후의 동생. 23세 '근(根)'자 항렬.
  • 효현왕후 : 헌종의 정후. 24세 '병(炳)'자 항렬.
  • 철인왕후 : 철종의 정후. 24세 '병(炳)'자 항렬.
  • 김삿갓 : 본명은 김병연. 24세 '병(炳)'자 항렬.
  • 김병국 : 조선 후기 정치인이자 영의정. 24세 '병(炳)'자 항렬.
  • 김병학 : 조선 후기 정치인이자 영의정. 24세 '병(炳)'자 항렬.
  • 김병시 :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자 영의정, 내각총리대신. 24세 '병(炳)'자 항렬.
1.3.1.1.1. 세도 정치 기간의 인물
1.3.1.2. 근, 현대 인물
  • 김옥균 : 조선 말기 개화파 정치가. 25세 '균(均)'자 항렬.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25세 항렬자가 '균(均)'에서 '규(圭)'로 바뀌었다.
  • 김가진 : 조선 말기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 26세 '진(鎭)'자 항렬.
  • 김좌진 : 독립운동가, 청산리 전투 참조. 26세 '진(鎭)'자 항렬.
  • 김기진 : 소설가. 필명은 김팔봉. 26세 '진(鎭)'자 항렬.
  • 김우진 : 연극인. 26세 '진(鎭)'자 항렬.[9]
  • 김성진 : 의사, 전 보건사회부 장관. 26세 '진(鎭)'자 항렬.[10]
  • 김성진 : 전 청와대 대변인, 전 문화공보부 장관. 26세 '진(鎭)'자 항렬.
  • 김익진 : 대한민국 제2대 검찰 총장, 대법관. 26세 '진(鎭)'자 항렬.
  • 김대진 : 교육자, 전 국회의원. 26세 '진(鎭)'자 항렬.
  • 김두한 :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자 전 국회의원. 27세 '한(漢)'자 항렬.
  • 김증한 :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특히 민법학) 교수. 27세 '한(漢)'자 항렬.
  • 김수한 : 전 국회의장. 27세 '한(漢)'자 항렬.
  • 김성한 : 전 야구 선수. 27세 '한(漢)'자 항렬.
  • 김태한 : 전 야구 선수. 27세 '한(漢)'자 항렬.
  • 김민지 : 전 SBS 아나운서. 축구선수 박지성의 부인. 27세 '한(漢)'자 항렬.
  • 김성동 : 소설가. 28세 '동(東)자' 항렬.
  • 김성동 : 전 국회의원. 28세 '동(東)자' 항렬.
  • 김을동 : 배우 겸 정치인. 28세 '동(東)자' 항렬.
  • 김윤동 : 야구 선수. 28세 '동(東)자' 항렬.
  • 김구라 : 본명은 김현동, 28세 '동(東)'자 항렬.
  • 김옥숙 : 노태우 전 대통령의 영부인. 28세 '동(東)자' 항렬. 오빠는 김복동.
  • 김학동 : 예천군수. 교육인. 28세 '동(東)자' 항렬.
  • 김시현 :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29세 '현(顯)'자 항렬.[11]
  • MC그리 : 본명은 김동현. 29세 '현(顯)'자 항렬.
  • 김상년 : 전 군인, 정치인. 30세 '년(年)'자 항렬.
  • 김용기 : 농촌운동가. 30세 '기(基)'자 항렬.
  • 김익기 : 전 국회의원. 30세 '기(基)'자 항렬.
  • 김인기 : 전 공군참모총장. 30세 '기(基)'자 항렬.
  • 김범일 : 전 대구 광역시장. 31세 '일(鎰)'자 항렬.
  • 김종일 : 육상선수.[12] 31세 '일(鎰)'자 항렬.
  • 김종모 : 전 야구 선수. 김성한 룸메이기도 했다.
  • 김지영(1938) : 배우.
  • 김현철 : 코미디언.
1.3.1.3. 장동(壯洞) 김씨와 세도정치
세도정치를 주도한 세력은 흔히 '장동 김씨'라 불리는, 한양을 근거로 한 후 안동 김씨의 한 분파(주로 김상헌, 김상용 후손)였다.

이들 장동 김씨는 장동, 즉 장의동(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일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당시 정계 고위직에서 영남 남인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지방의 양반들은 영호남 할 것 없이 은거하며 학문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지방 양반 중에는 기호(경기 / 충청) 지역의 노론 이외에 기호 지역의 소론, 남인 일부가 요직에 등용된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영남 유림들은 정조, 순조에 끝없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주장하며 이름도 유명한 영남 만인소를 여러차례 올리기도 했고 훗날 대원군이 세도 정치를 혁파하고 탕평적인 인사를 펼치고 나서야 영남 유림들이 일부 등용되었으며 그들은 이후 대원군의 지지 세력이 되었다.

장동 김씨는 주류인 노론에 합류하였고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시파로 노선을 타면서[13] 정조의 눈에 들게 된다. 김조순은 정조가 총애했고 생전에도 그와 사돈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정조 본인도 김조순의 증조부인 김수항 등의 학문을 정순하다고 여겨 존경했을 정도였다. 정조 본인은 노론 자체를 싫어한 것도 아니며, 싫어할 수도 없는 것이 오히려 노론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인물이다. 정조는 문체반정이니 하는 행보를 밟았고 심환지에게 나도 벽파라며 커밍아웃하기도 했다.

안동 김씨는 나라 망하게 한 가문으로 인식이 박혀 있지만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청백리나 훌륭한 관리, 재상도 많다. 세도 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도 실록을 보면 관서 지방을 다녀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상소한 일도 나오고, 관대한 면도 있는 유능하고 곧은 관료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생전에 정조의 큰 신임을 받는 정조의 친위 세력이었고, 그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된 것도 정조의 유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안동 김씨를 이끌던 시기는 안동 김씨의 전횡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김조순은 당대에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김조순의 뒤를 이어 김조순의 아들인 김좌근과 양손자인 김병기, 또다른 장동 김씨인 김문근 등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세도 정치는 모두가 아는 막장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과거에서 왕족을 제치고 장동 김씨 출신이 급제하자 '조선이 이씨의 나라인가, 김씨의 나라인가'를 외친 경평군 이세보[14]가 털려서 귀양을 갔을 정도였다. 어찌나 이들의 위세가 높았는지 이원경을 추존하려던 역모의 주모자들도 왕은 갈아치워야 하지만 안동 김씨는 보전해야 한다는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래도 상황이 급변하면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었음을 우려했는지 왕실의 외척 즉 왕의 장인 자리는 놓지 않았다.

비록 헌종조 초와 철종조의 안동 김씨의 권력 독점은 조선이 망하는 데 크게 기여한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이들은 자기 집안이라면 능력도 안 보고 무조건 요직에 앉힌 여흥 민씨[15]와는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일족 관리가 굉장히 철저한 편이다. 참고로 이 집안은 무능하다고 판단되면 얄짤없이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보내는 건 기본이고 승진도 안 시켜준다. 실제로 그 악명 높은 흥선대원군조차도 손을 쓰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김병학김병국을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건 불가능했다.[16] 고종 초의 정승과 재상직을 역임하며 대원군의 개혁 파트너 급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병학은 고종 초의 대표적 영의정이었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했으며, 그의 아우인 김병국은 이조 판서, 호조 판서를 역임했고 사창제 실시에 크게 기여했다.[17] 그렇지만 끝내 정승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이 한이 됐는지 대원군 하야를 거들었고 덕분에 고종 친정 이후에 이최응과 함께 정승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 김병기는 병조판서, 좌찬성을 역임했다. 대원군 하야 이후에는 김병덕, 김병교, 김병시, 김병지 등 안동 김씨들이 판서급의 요직에 대거 기용되었다.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은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엄밀히 말해선 큰 관심이 없던 것에 가깝지만. 천주교 탄압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정순 왕후와 벽파 세력이었고 그 이후에 집권한 안동 김씨 입장에선 굳이 천주교 잡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안동 김씨 내부에서는 천주교 신자들도 간간히 나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김상헌의 봉사손인 김건순으로 이 사람은 병자호란치욕을 씻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청나라를 정벌하려는 망상을 품고 있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여러 의미에서 시파(時派 : 시류에 영합)다운 면모. 헌종 때의 천주교 박해인 기해박해를 주도한 세력은 풍양 조씨.[18] 그래서 기해박해는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박해라는 해석이 있다. 다만 기해박해 때는 순원 왕후 김씨의 수렴 청정기였고 김좌근이 대비의 자문을 맡고 있었던 데다가 바로 다음해에 기해박해를 주도한 정승이자 풍양 조씨와 겹사돈 관계였던 이지연이 탄핵, 유배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풍양 조씨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식으로까지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가 그럭저럭 잘 지낸 걸 보면 애초에 두 가문이 싸우기나 한건지...[19]

1.4. 관련 항목

2. 카툰연재 갤러리의 만화가

2008년부터 카툰연재 갤러리에 출입해 온 카연갤의 터줏대감 중 한 명이다. 동년 5월 11일을 시작으로 6년 동안 처음 올린 똑같은 내용의 만화를 매번 다른 제목으로 올리고 있다. 아주 가끔 다른 만화를 올리기도 하는데 그 올린다는 게 따위다.

카툰연재 갤러리를 오랫동안 이용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 사람을 무시하거나 숭배하는 경우가 많은데, 팬픽도 여럿 보이며 그 중 하나는 힛갤에 갔다.

2014년 3월 16일 이후로 아무 말 없이 종적을 감췄으며, 그가 올린 마지막 글에는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댓글이 달리고 있다.


[1] 똑같은 예로 남양 홍씨 당홍계(唐洪系)와 남양 홍씨 토홍계(土洪系)가 있다.[2] 유독 한 분이 넘사벽으로 유명하지만 조선의 충무공은 모두 9명이다[3] 물론 그동안 떵떵 거리며 살던 사람들 입장에선 몰락이다[A] 즉, 김구의 먼 친척 동생뻘 된다[A] 즉, 김구의 먼 친척 동생뻘 된다[6] 新자가 붙었으나 발생 연도와는 무관하다.[7] 물론 100% 는 아니다. 예외는 있다.[8] 청음 김상헌의 7대손.[9] 1926년 <사의 찬미>를 불렀던 가수 윤심덕과 함께 대한해협에서 투신한 그 사람이다.[10] 실제 피격당한 심영을 제일 먼저 치료한 의사이다. 그러고보니 아들 뻘 항렬이...?[11] 의열단원으로 영화 <밀정>에서 공유가 맡았던 김우진의 실제 모델이다.[12]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남자 멀리뛰기 금메달을 수상했다.[13] 김달순 처럼 사도세자를 비판하던 벽파에 가담한 장동 김씨도 없지는 않았다.[14] 단, 이 말 자체는 경원군 이하전이란 주장도 있다.[15] 민비 민씨의 친정[16] 참고로 이 둘은 흥선대원군과 친밀한 관계였고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거나 유보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런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17] 사창제(社倉制)는 사창을 백성이 직접 관리하는 제도이며 주자의 정책이다. 고종 실록에 김병국이 사창제를 건의하는 기사가 실려있는데 김병국과 고종 모두 주자의 정책임을 인지하고 있다. 사창제 자체도 성공적이라 고종 11년 호조 판서가 고종에게 "그래도 사창제가 환곡 중에서 가장 낫습니다." 라고 할 정도이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18] 박해 사건이 풍양 조씨가 득세할 때 일어났기에 풍양 조씨 세력이 박해를 주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박해를 하라고 시킨 인물은 순원 왕후였다. 본격적인 탄압이 있던 것도 순원 왕후가 "왜 요즘은 서학을 안때려잡냐? 얼른 때려잡아라" 라고 해서 벌어진 일이다. 사실 안동 김씨가 천주교에 큰 관심이 없었어도 일단 때려잡을 수 밖엔 없었을것이다. 그들 자신도 유자고 유자 중에 신주 불태우고 제사 안지내는 행위를 옹호할 사람도 그걸 주장할 명분이 있는 사람도 없다. 아무리 안동 김씨가 강하나 천주교를 때려잡지 않는다는것은 지방 유림들에게 "저 인간들 안되겠어" 라며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몰아낼 가능성이 높았다.[19] 철종 즉위 후 헌종의 정책을 몽땅 다 뒤집고 헌종을 도왔던 이들을 죄다 처벌했는데 이들 중 풍양 조씨는 조병현 한 명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