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 작품 안녕, 에리에 관한 해석 및 오마주를 정리한 문서이다.2. 해석
작품 구조 특성상 유우타가 실제로 겪은 현실과 창작상의 허구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 독자의 시선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게 갈린다.작품 내적으로는 작중 서사를 현실적 법칙성을 반영하여 설명하려는 각 3가지 주장과, 예술적 법칙성을 반영하여 이러한 판단을 거부하려는 주장이 있다. 전자의 경우 다음과 같다.
- 중년 유우타 씬은 현실이다.
만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해석, 유우타의 영화의 플롯처럼 실제로 에리는 흡혈귀였고, 중년 유우타의 아버지와 가족이 사고로 죽어버려 삶의 의욕을 잃어 자살하러 추억 속의 폐허에 왔다가 에리를 만난다. 마지막 '현실의 에리'가 '영화 속 에리'처럼 안경도 교정기도 쓰지 않은 것은 주인공 아빠가 했던 말처럼 유우타가 찍은 영화를 통해 에리 본인을 포함한 모두에게 에리의 이미지가 '안경도 교정기도 쓰지 않은 아이'로 기억되었기 때문.[1] 이 해석에 따르면 마지막의 폭발은 유우타의 망상[2], 혹은 연출이다. 어머니의 죽음에서의 도피로 연출된 첫 폭발과는 다르게, 과거로부터의 결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중년 유우타 씬은 영화의 일부이다.
어른이 된 유우타가 아버지와 닮았다는 장면에서 착안한 설. 아버지가 수염을 깎고 '중년이 된 유우타'를 연기했으며, 에리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심각하게 진행되기 전에 '흡혈귀 에리'를 연기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마지막의 폭발은 유우타가 에리의 죽음이라는 저항할 수 없는 미래를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넣은 의도적인 수미상관적 연출이다. - 작품 전체가 영화이다.
위의 해석에서 더욱 발전시킨 설. 에리는 안경에 교정기를 끼고 성격도 더러웠다는 친구의 말과는 달리 본작에서 에리는 유우타와의 첫 만남때부터 안경도 교정기도 끼지 않고 있었다. 즉, 주인공이 에리를 만나러 옥상에 뛰어드는 신부터 영화였다는 것. 이러면 영화를 촬영하는 흡혈귀와 소년의 영화를 촬영하는 소녀와 소년의 영화를 촬영한, 3중 구조가 된다. 그래서, 작중 '영화 촬영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연기하는 아버지를 연기하는 아버지' 신이나, 중학생 커플 둘이서 외박 여행을 다녀온다는 비현실적인 에피소드가 나오거나, 일상적인 장면에서도 주인공의 1인칭, 혹은 핸드폰 카메라 시점으로 진행되는 점 등의 의도적으로 들어간 메타적 요소들에서 볼 때, 사실 작품 전체가 주인공이 찍은 하나의 영화라는 설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마지막 폭발은 단순한 유우타의 취향[3]이거나 또는 첫 작품 폭발 엔딩에 어이가 터졌다고 혹평했던 학교 친구들에게 보내는 빅엿으로 볼 수 있다. 에리와의 아름다운 추억과 깔끔한 마무리를 통해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나 싶더니, 또다시 폭발 엔딩으로 마무리 함으로서 폭발 엔딩으로 끝나는 쓰레기 영화보고 울었다는 굴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앉을 생각 없으면 나가주겠어?"라는 에리의 말에 그 이상 사족을 달지 않고 에리에게 작별을 고한 것까지 전부 포함해 해석하자면, 유우타가 본 영화('안녕 에리')를 통해 '착실히 살아가자는 마음'[4]과 '영화를 만들 자신'[5]을 얻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이 세 해석 외의 다른 해석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마지막 폭발 씬은 중년 유우타가 에리를 잊기 위해 진짜 부지를 사서 폭발시켰다고 볼 수도 있고, 애초에 어머니의 죽음과 학생들의 비웃음도 연출에 불과한 하나의 큰 단편 영화 기획이였다고 볼 수도 있다. 상술했듯 작가가 의도적으로 현실과 비현실이 나뉘는 분기점을 여러 가지로 설정해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현실 법칙을 통해 설명하려는 입장에선 어느 한 해석이 정설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한편으론 이러한 구분이 작품을 설명하는데에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있다. 예술 세계의 총체성은 현실 세계의 총체성을 반영하지 않는 주관적인 제 2 세계이고, 그 세계의 과학법칙은 표현의도에 따라 아무렇게나 바뀔 수 있다.
작품 외적으로는, 후지모토 타츠키의 자전적 만화라는 해석이 있다. 작중에서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를 통해 비판받는 유우타의 모습은 데뷔작인 《파이어 펀치》의 전개와 엔딩으로 비판받은 타츠키 그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으며, 다시금 폭발 엔딩을 통해 작품이 끝나는 것 또한 작가 자신의 개성[6]을 밀고 나가겠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다음 단편인 <평범하게 들어줘>는 아예 이런 요소를 주제로 하고 있기도 하다.
아래는 외부 커뮤니티의 해석.
2.1. 핸드폰
"카메라 앞이 아니라면 현실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 어머니의 죽음을 찍는 과정에서 유우타는 점점 카메라 속의 세상과 진짜 현실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괜찮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건강이 점점 위독해지자 다가오는 이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현실 전부를 카메라 속에 담게된다.
- 에리를 만나면서 다시금 도피처가 아닌 순수한 영화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친 것도 돌이켜보게 되었지만 에리의 죽음으로 인해 유우타는 다시금 카메라 속으로 도망치게 된다.
- 어머니 때와는 달리 끝까지 에리의 마지막을 지켜보았기에 뭔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유우타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후에 드러난다. 결말부분에 나왔듯이 그는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다니고 영화의 재편집에 몰두하고 있었다.
- 유우타의 문제는 추억의 장소에서 에리와 재회하고 나서야 해결된다. 그 장소로 향할 때 들고간 것은 밧줄과 핸드폰이었지만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것은 밧줄뿐이다.
- 갖고간 밧줄은 현실도피의 의미가 크지만 갖고나온 밧줄은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강하다. 추억의 장소에서 에리와 유우타가 주고받은 문답의 결론. 안녕 에리라는 영화는 유우타가 살던 카메라 속의 세상과 현실세계가 합쳐지면서 막을 내린다.
2.2. 판타지
"그런데 이 영화, 판타지가 살짝 모자라지 않아?"
- 이 만화의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이자 해석에 있어 난해함을 더한 요소이다. 유우타가 어렸을 때 아빠 얼굴을 드래곤으로 그려놓았던 것, 동물원에서 기린과 하루종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부터 시작해서 영화의 폭발장면,흡혈귀,에리가 말한 부족했던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전부 판타지라는 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 일반적으로 판타지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망상장애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망상장애는 병적인 상태이지만 망상이나 환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 차이점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며 그 정도에 따라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고, 이 부분이 바로 작가가 노리는 점이기도 하다. 유우타는 망상증을 갖고 있지만 그에 관한 작가의 관점은 긍정적이란걸 판타지라는 용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어렸을 적 아빠를 드래곤으로 그린 것이나 기린과 대화한 것은 순수한 아이의 상상력이다. 중학교 때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심적 갈등을 영상화하여 표현하였다. 에리와의 영화에서는 에리가 죽지 않았으면 하는 염려에서 그녀를 흡혈귀로 표현하였다.[7] 여기까지만 보면 판타지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형태라고 볼 수 있겠지만 결말부위에서 유우타와 에리의 생각이 갈린다. 유우타는 흡혈귀 설정을 판타지라 여기고 영화를 계속 재편집했던 이유를 찾지 못한 반면, 에리는 그건 판타지가 아니라고 분명히 단정짓는다.[8]
- 계속 타인의 죽음을 두려워하던 유우타는 그를 걱정하여 흡혈귀 설정을 넣었지만 에리는 영원한 추억을 말하며 삶을 긍정한다. 즉 에리가 말하는 판타지란 과거를 향한 미련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긍정적인 상상을 의미한다.
2.3. 폭발
"마지막에 왜 폭발시켰어?"
"최고지 않나요?"
"최고지 않나요?"
- 작품 초반부 유우타 어머니의 진면목을 모르는 독자는 이 폭발 장면을 보면서 유우타 학교 친구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단순히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을 폭발시켰단 것만 따지고 보면 욕먹어도 이상할게 없는 장면이다. 만화 내에서 여러가지 판타지가 나오지만 이 폭발장면은 유우타의 마음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판단이 갈리므로 선악의 경계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유우타가 폭발시킨 이유에 관한 것은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초반부에는 알 수 없지만 중반부터는 유우타 어머니가 유우타를 도구 취급을 해왔다는 걸 알 수 있고, 그에 따라 가장 쉽게 풀이하면 그동안 쌓인 분노내지 울분을 해소하는 과정으로 해석가능하다. 다만 그 대상은 자신의 어머니 자체보다는 자신에게 아무런 추억도 남기지 않고 이별하게 되는 안타까운 처지에 가깝다.
- 어머니를 찍은 영화는 일핏 보면 다정해보이는 그녀를 담은 추억의 선물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그 영화에 담은 것은 거짓된 어머니의 모습과 거짓된 추억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폭발시킨 것은 병원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일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 그 자체로도 괴로운 일이겠지만 변변찮은 추억조차 없다는 건 더욱 괴로운 일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어머니의 시선은 유우타가 아닌 카메라 렌즈만을 응시하고 있었고 유일하게 유우타를 향했던 시선은 아버지가 찍은 동영상 뿐이었지만 그녀의 입술은 사랑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 이 폭발장면에 관해서 에리는 유우타의 마음을 이해해주면서 속시원했다고 말한다. 만화 내에서 유우타의 망상에 동조하는 사람은 에리와 유우타 아버지 둘뿐이며 결말 부분에서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다만 엔딩컷에서 다시 유우타는 추억의 장소를 폭발시키면서 홀로 서기에 성공한 모습을 보인다.
- 영화 부분의 폭발이 도피적 성향을 갖고 있다면 결말 부분의 폭발은 회귀적 성향을 갖는다. 어머니를 찍은 영화는 현실을 기반으로한 다큐멘터리인데 이 폭발장면으로 인해 장르가 판타지로 바뀐다. 반대로 흡혈귀의 부활이라는 판타지 성향의 에리 영화는 에리의 죽음을 인정하면서 현실 그 자체로 되고 망상의 매개체인 핸드폰 또한 유우타의 손을 떠나게 된다.
2.4. 유우타의 어머니
"정말 마지막까지 못 써 먹을 아이구나."
- 극초반부라서 무심코 넘어갔을 수 있지만 자기 아들한테 엄마가 죽어가는 과정을 찍어달라 부탁하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유우타를 사이에 두고 에리와 모든 면에서 상반된 포지션에 있는 인물이며 만화 내에서 가장 극적인 반전을 포함하고 있다. 파이터클럽의 내용과 비교해본다면 파이터클럽 주인공을 억압하고 있던 물질만능주의 현대사회에 해당한다.
- 애초에 자신의 죽음을 찍어달라는 것 자체가 생명경시현상을 희화화한 것이기도 한데 실제로 요즘은 유튜브를 통해서 목숨을 건 영상을 찍는 사람들도 흔히 보이는 상황이다. 파이터클럽 결말에서 물질분명의 붕괴를 암시하듯이 건물이 위에서 아래로 무너지는데, 쌓아올린 문명사회가 수직적인 구조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마음을 억압하는 것처럼 유우타의 어머니 또한 유우타의 망상을 억압한다.
- 영화를 찍을 때도 늘 유우타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며 아름다운 겉모습만 찍기를 강요한다. 유우타가 늘 타인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죽음마저도 무언가를 위한 도구이며 유우타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음이 아버지의 동영상을 통해 밝혀진다.
- 에리가 죽은 뒤 유우타는 다시 어머니의 동영상을 본다. 평소 그녀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유우타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모습 그대로 추억하려한다. 서로 상반된 포지션이었던 에리와 유우타 어머니였기에 에리의 죽음을 통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2.5. 고양이
"있지 뭘 찍는거야?"
"고양이..."
"고양이..."
- 고양이를 찍는 걸 싫어한 유우타 어머니와 달리 에리는 고양이를 좋아하고 유우타 역시 에리가 고양이를 쓰다듬는 장면을 찍어둔다. 유우타 어머니와 유우타가 그 신장 차이만큼 눈높이 차이가 나는 것처럼 유우타와 고양이 또한 그만한 눈높이 차이가 날 것이다. 유우타 어머니가 유우타를 향해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적도 없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아래에 있는 고양이에게 신경쓸 리 없다.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것이 생명이라면 고양이는 그 생명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의미하게 된다. 유우타 어머니와 상반된 포지션인 에리는 무릎을 굽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수평적 관점에서의 생명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 렛미인 스웨덴판에서도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만화와는 달리 흡혈귀인 엘리가 인간이 아님을 알아보고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2.6. 에리
"볼 때마다 너와 만날 수 있어. 내가 몇 번이나 너를 잊더라도 몇 번이든 다시 생각해낸다."
"정말 근사한 일 아니야?"
"정말 근사한 일 아니야?"
- 이토 유우타의 동조자이자 구원자이다. 실제로 에리는 유우타가 자살하려 할 때마다 구해주었다.
- 모든 면에서 유우타 어머니와 대조되는데 유우타 어머니가 남긴 유언이 자신의 영화를 완성하라는 독설에 가까운데 반해 에리의 유언은 유우타의 영화를 완성해달라는 부탁에 가까웠다. 유우타는 둘의 죽음으로부터 추억조차 없는 이별의 서글픔과 너무 많은 추억으로 인한 이별의 아픔을 동시에 배우는데, 그 허무함에 빠진 유우타를 구원한 것은 결국엔 에리와의 추억이었다.
- 결말부분에서 에리에 관한 작가의 생각이 엿보이는데 3일만에 부활했다는 표현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했고 구원자란 역할도 그런 늬앙스로 해석할 여지가 생겼다. 다만 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유우타는 결국 이를 극복하고 그녀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래서 마지막 폭발 장면이 유우타의 홀로서기를 의미한다면 죽음에 관한 종교적 귀의보다는 생에 관한 실존적 의지쪽이 좀 더 작품 주제에 걸맞게 된다.
- 원본인 렛미인에서는 '엘리'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엘리(elle)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문장이 유명한데 히브리어로 엘리는 '나의 하느님'이란 뜻이다. 만화 결말과 결부시켜서 생각한다면 '나의 하느님'이란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되는 셈이다.[9]
- 에리 친구와의 대화에서 드러난 것처럼 평소 에리의 모습은 유우타와 에리 친구밖에 모른다. 이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안녕 에리라는 만화의 독자에서 유우타가 만든 안녕 에리라는 영화의 관찰자로 변한다. 재미있는 것은 결말 부분의 유우타의 망상 조차도 그 미화된 버전의 에리라는 점이다. 다만 이것은 작가가 넣어둔 하나의 판타지적인 요소이고 이런 가정하에서는 병원 옥상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조차 번거롭게 다시 찍은 셈이 된다. 오마쥬로 들어간 파이터클럽, 조커, 메멘토 등은 전부 관람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는데 비슷한 맥락으로 넣어둔 거라 생각하면 될 듯하다.
- 유우타가 버릇처럼 말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작품 전반에 흐르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이에 맞서는 에리의 메세지는 "메멘토 비베레(memento vivere)"일 것이다.[10]
2.7. 이토 유우타
- 이토 유우타라는 인물의 실제 모델에 관한 몇 가지 가설 중 하나는 그가 후지모토 타츠키 본인이라는 것이다. 다소 오해받기 쉽지만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영화를 만드는 이토 유우타가 타츠키라면 그의 개성을 억압하는 유우타의 어머니는 만화 편집부 정도 될 것이다. 유우타의 폭발씬이 대중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윤리적으로 비판받은 것처럼 타츠키의 작품들도 금기나 사회도덕적인 면을 건드리는 경우가 잦다. 반면 유우타에게는 소수의 동조자가 존재하고 곧 그들이 구원자가 된다. 처음엔 유우타의 영화를 비웃었던 사람들도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타츠키는 마이너한 만화를 즐기지만 대중성을 가미한 체인소맨은 보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 전작인 단편 룩백에서도 주인공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딴 후지노로 지었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다. 후반부에 에리의 죽음 이후에 유우타는 2728시간짜리 동영상을 편집하는데 이것을 27-28로 읽으면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집인 17-21, 22-26과 연결된다. 이 단편집의 제목들은 타츠키 본인이 그 나이때 그린 단편들을 모은 것이라 하는데, 그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27-28에 해당하는 만화는 체인소맨 1부이다.
- 이토 유우타라는 이름을 중간에서부터 앞으로 읽으면 유->토->이가 된다. 유토리(ゆとり)교육은 과거 일본에서 시작된 개성 위주의 전인교육을 의미하고 이 교육을 받은 세대를 유토리 세대라 부른다. 이토 유우타는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자살을 시도하는 등 나약한 면도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남들이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놀라운 상상력을 갖고 있다. 유토리 교육은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유토리 세대들은 일본내에서도 좋지 않은 이미지로 남았지만 적어도 이 만화 안에서 이토 유우타의 개성은 존중받고 있다. 그리고 작가인 후지모토 타츠키 역시 이 유토리 세대에 해당한다.
3. 오마주
3.1. 렛미인[11]
- 렛미인은 '안녕 에리' 전체 스토리의 틀이 된 작품이다. 흡혈귀인 여주인공 '엘리'와 인간 남주인공 '오스칼'의 이야기이며 세부적인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엘리'의 나이가 200세인 것을 '안녕 에리' 전체 페이지 수를 200페이지로 똑같게 맞추면서 사실상 렛미인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했음을 확정할 수 있다.
- 안녕 에리에서는 이토 유우타의 아버지가 등장하고 에리의 가족관계는 알 수 없는데 렛미인에서는 반대로 엘리의 아버지인 호칸이 등장하고 오스칼의 아버지는 이혼한 상태이다.
3.2. 파이트 클럽
- 유우타와 에리가 처음 함께 본 영화가 파이트 클럽이다. 안녕 에리에서 오마주되거나 언급된 영화들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기억력이나 망상이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스토리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을 이토 유우타와 겹쳐본다면 에리의 포지션에 있는 인물은 말라 싱어이다.
- 파이트 클럽은 단순한 오마주뿐 아니라 안녕 에리와 주제 의식도 공유한다. 파이트 클럽과 안녕 에리의 엔딩 컷은 각각 문명 사회와 죽음에 대한 자아 성찰과 극복을 의미한다.
[1] 슬픈 점은, 이 해석에서는 '원래의 에리'가 어땠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유우타 본인을 포함해 아무도 없다.[2] 에리가 판타지가 부족하다고 타박했는데, 에리가 흡혈귀였던 부분이 판타지가 아니게 되므로 폭발이 판타지.[3] 유우타의 아버지가 "유우타 하면 영화, 유우타의 영화 하면 폭발"이라고 말한 것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작품 전체가 영화라고 한다면, 유우타를 가장 가까이서 보고 깊게 이해하는 사람인 '아버지'가 데드 익스플로전 마더의 폭발 엔딩을 '유우타의 영화라면 폭발이다'라고 인정하는 신을 넣음으로써 시청자에게도 '이것이 나의 영화다'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4] '에리를 찍은 극중극'은 유우타의 '과거'를 상징하므로,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는 것은 가족도, 아버지도 죽고 혼자 남았지만 그럼에도 자살을 택하는 대신 앞으로 펼쳐질 자신만의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을 결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5] 유우타 자신의 '판타지이자 초심'인 '폭발'을 다시금 결말로 채택했다는 것은 첫 영화에서 채택한 연출의 혹평을 딛고 자신이 끝내준다고 생각한 연출을 자신있게 밀고 나가겠다는 내적 자신감을 그대로 드러낸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6] 작중에서는 '유우타의 영화 하면 떠오르는 것'이라는 물음에 유우타의 부친이 '폭발'이라고 답한다.[7] 만화 중반에 흡혈귀 설정에 관한 에리의 질문에 '이런 아름다운 사람에게라면 피를 빨려도 좋다고 생각해서'라고 답하지만 이유 전부를 말한 건 아닐 것이다. 유우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어머니와 에리를 겹쳐보고 있었고 어머니에 대한 미련이 그러한 설정으로 드러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8] 유우타가 영화를 재편집하면서 기다린 결말은 에리의 부활이었다. 하지만 유우타의 망상 속에서 재회한 에리는 유우타가 자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미래로 나아가기를 원한다.[9] 다만 렛미인의 원작자인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는 이를 부정했다. 당시 많은 독자들이 이 의미를 신경쓰고 있었는데 정작 원작자는 글을 쓸 때 의도한 적이 없다고 인터뷰했다.[10] "삶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유우타와 에리가 작품 내 몇 번 보여주었던 손가락 브이가 바로 그 복선이다.[11] 일본에서의 발매명은 나의 엘리 200세의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