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05 18:37:06

아테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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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테루이2.jpg
아테루이의 고향에 세워진 아테루이 상

アテルイ (아테루이) 혹은
大墓公阿弖利為 / 大墓公阿弖流為 (たものきみ あてるい) 다모노키미 아테리이 (정식 이름)
? ~ 802년 9월 17일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 문헌

1. 개요

아테루이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활동한 군사 지도자이다. 8세기에 이사와 지역 에미시의 부족장으로 근 13년간 야마토 조정에 저항했다. 두 차례에 걸친 야마토 조정의 원정군을 격퇴했으나 그 과정에서 점차 세력이 쇠퇴하여 결국 3차 원정군에게는 패하여 수도로 이송된 후 처형되었다.

2. 생애

아테루이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일본열도 동북 지방의 무쓰 국 이사와 지역을 거점으로 한 에미시 부족의 군사 지도자이다. 사료에는 ‘아테루이’ 혹은 ‘아테레이’로 표기되어 있는데 한자의 읽기가 정확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현재는 통상적으로 아테루이라고 읽는다.

아테루이라는 이름이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속일본기(続日本紀)와 일본기략(日本紀略) 두 곳이다. 속일본기에서는 789년 스부세 촌 전투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아테루이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당시 조정은 에미시를 공략하기 위해 이사와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려는 군사 계획을 세우고 정동대장군 키노 코사미를 파견했다. 무렵 이사와로 진군한 조정군이 통과한 땅이 적의 수이 아테루이의 거처였다.

키노 고사미는 이 진군까지 이사와의 입구인 고로모 강에 군사를 주둔시킨 채 지체했는데, 5월 말 간무 천황의 질책을 받아 행동을 시작했다. 기타가미 강 서쪽에 세 곳으로 나뉘어 주둔하던 조정군 가운데 중군과 후군의 4천이 강을 건너 동안(東岸)으로 나아갔다. 이 주력군은 아테루이의 거처 앞에서 에미시군 약 3백 명과 교전하였다. 처음에는 조정군이 우세했으나, 에미시군을 뒤쫓아 스부세노무라에 이르렀을때 그곳에서 전군(前軍)이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전군은 에미시군에 막혀 강을 건너지 못했고, 이때 에미시측의 약 8백이 가세해 반격해 왔다. 나아가 동쪽 산에서부터 에미시군 4백이 출몰하여 조정군의 후방을 쳤다. 조정군은 마침내 패주하였다. 하세쓰카베노 요시오사(丈部善理) 등을 비롯해 25인이 전사하고, 화살에 맞은 자가 245인, 강에 익사한 자가 1036인, 갑옷을 빼앗기고 알몸으로 헤엄쳐 온 자 1,257인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에미시 사회는 부족마다 전사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으며아테루이는 이사와 지역의 에미시 전사 집단의 연합군을 형성하여 정부군에 대항한 것으로 보인다. 아테루이는 이때부터 근 13년에 걸쳐 정부군의 침략에 저항했다.

일본기략에는 802년 정부군에게 항복했다는 내용 속에 아테루이의 이름이 나온다. 아사와 지역에 대한 첫 원정 실패 이후 조정은 790년에 정이대장군 오토모노 오토마로와 부장군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를 파견했다. 이 두 번째 원정에서 조정군은 에미시에게 승리했으나 아사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한 듯하다. 이후 796년부터 3차 원정 계획을 진행한 사카노우에노는 801년에 이사와 지역 원정에 출발하여 이듬해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아테루이와 이와구노기미 모레를 포로로 잡아 헤이안쿄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카노우에노는 아사와 지역의 에미시를 통치하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며 천황에게 두 사람을 살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귀족들이 야만스러운 본성에 짐승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라 반역하고 복속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다며 반대했고, 결국 8월 13일에 가와치 국에서 두 사람은 처형되었다고 한다. 당시 야마토 조정은 권력 기반을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정착 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새로운 농경지와 노동력을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일본열도 동북 지방으로의 영토 확장이었다.

3. 여담

사카노우에노가 위대한 장군으로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다양한 전설로 전해지는 것에 비해, 아테루이에 관한 내용은 그 후의 문헌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히라카타시에 이전부터 존재하던 패총과 그 부근에 있는 카타노 신사의 옛터에 있던 패총이 아테루이와 모레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있다. 1995년부터 매년 이와테현 현인회가 여기서 아테루이 위령제를 올렸고, 카타노 신사가 제사를 담당했다. 그러나 이 패총을 발굴한 결과 패총은 아테루이가 활약한 시대보다 200년이나 이전 시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테루이가 조정에 반기를 든 역적이므로 남은 기록이 변변치 않았으나 80년대 후반 일본에서 비주류 역사 인물들이 주목받기 시작하며 고대 도호쿠의 저항을 대변하는 영웅으로 떠올라 2005년 아테루이의 기일에 맞추어 오슈시에 위령비가 세워졌다. 2013년에는 NHK 드라마 카엔·북의 영웅 아테루이전에서 아테루이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4. 참고 문헌

일본사 여행-하종문(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