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지 전경
아이발르크 항구
연륙교로 연결된 관광지 준다 섬의 풍경
1. 개요
튀르키예어 Ayvalık그리스어 Αϊβαλί
터키 서부의 도시. 발르케시르에서 서남쪽으로 100km, 베르가마에서 서북쪽으로 40km, 차나칼레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불과 20km 근해에 그리스령 레스보스 섬과 마주하고 있다. 에게해의 주요 관광 도시로, 평상시 인구는 7만이지만 여름 성수기 철이면 인구의 반에 달하는 여행객들이 몰려와 활기가 돈다. 본래 그리스어로 키도니에스 (Κυδωνίες)라 불리던 도시에는 1922년까지 그리스계 기독교도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으로 이들은 추방되고 그리스 본토의 무슬림들로 대체되었다. 다만 후자 집단 역시 대부분 그리스어 화자였음으로 여전히 그리스 언어나 문화적 요소가 남아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출신 인물로 그리스의 작가 엘리아스 베네지스, 화가 포티스 콘토글루 등이 있다.
시내에는 모스크로 전환된 성당을 비롯한 옛 건물이 즐비하며, 연륙교로 이어진 준다 섬에는 크고 작은 호텔이 즐비하다. 항구에는 미틸리니와의 연락선이 운행된다. 철도역은 없으나 발르케시르 코자 세이트 공항과 불과 35km 떨어져 있다. 인근 유적으로 서북쪽 50km 지점의 아소스가 있다. 인근 농지에서는 올리브를 재배하며, 양질의 올리브유를 생산한다. 1998년에는 아이발르크 국제 음악 아카데미가 설립되어 세계 각지의 음악 지망생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준다 섬에는 하버드 대학교와 터키의 코치 대학교가 합작한 하버드-코치 대학교 오스만 & 튀르크 여름 집중 학교가 세워졌다.
2. 역사
모스크로 전환된 옛 정교회 성당. 아직도 창문의 십자가 문양이 남아있다
고대부터 레스보스 출신 이주민들이 정착했으나 해적들이 성행하여 도시 규모로 성장하지는 못했고, 준다 (모스코니시아) 섬의 인구가 더 많았다. 본격적인 도시는 오스만 제국기에 형성되었고, 처음엔 키도니에스라 불리다 튀르크식 지명인 아이발르크의 그리스 발음인 아이발리와 키도니에스가 혼용되었다. 1770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 체슈메 해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해군 제독 (카푸단 파샤) 제자이릴리 가지 하산 파샤 휘하의 생존자들이 피신해오자 현지 주교와 주민들은 머물 곳을 마련해주었고, 덕분에 기력을 회복한 병사들은 이스탄불로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 은혜를 잊지 않은 하산 파샤는 20년 후 대재상에 오르자 그곳의 그리스 인들에 대한 완전한 자치권을 하사하였고, 이로써 아이발리는 그리스 문화의 주요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과 함께 그리스 민족주의를 경계한 오스만 당국은 아이발리의 자치권을 회수하려 하였고, 이에 주민들이 봉기하며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오스만측 진압군은 주민들 중 성인 남성을 학살하고 여인들과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남은 주민들은 그리스 함대가 다가오자 재차 봉기하여 튀르크인 1500명을 학살하였으나 함대는 (아마 우연히 지나던 것인지) 곧 떠나버렸고, 보복에 나선 튀르크 민병대는 이번에는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다만 20세기 초엽에는 인구가 6만에 이를 정도로 회복되었다. 당시 아이발리는 작은 항구를 통해 비누, 올리브유, 동물 가죽, 밀가루 등을 수출하였다. 영국측 기록에 의하면 아이발리와 인근 에드레미트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양질의 올리브유를 생산하였고, 이는 영국과 이탈리아 등지로 수출되었다 한다. 다만 1차 대전기 기독교 인구가 다수 추방되거나 이주하며 올리브유 생산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에 오스만 당국은 4천 5백의 그리스계 가구를 다시 데려와 기존 집을 돌려주는 대신 감시 하에 임금을 주며 고용하는 형태로 올리브유 생산을 재개하기도 하였다. 그후 터키 독립 전쟁기인 1919년 5월 그리스 군이 점령했으나 1922년 9월 터키군이 수복하였다. 이때 일부 주민들은 후퇴하는 그리스 군과 함께 피난했으나 주교 그레고리오스 오를로가스 등 남은 이들은 터키군에게 사로잡혀 내륙으로 죽음의 행진에 처해진 끝에 대부분 사망하였다. 1923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시에 아이발르크에는 미틸리니, 크레타, 마케도니아 등지의 그리스 무슬림들이 정착하였다. 따라서 현재까지도 아이발르크 구도심에서는 그리스어를 들을 수 있다. 그리스인들이 떠난 후 올리브유 산업은 1950년대에 재개되어 다시 양질의 생산을 이어가고 있다.
3. 갤러리
서남쪽 아이발르크 만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