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6 04:54:11

심지

1. 초, 폭탄 등에 쓰이는 실2. 의복 등의 매무새를 잡아주는 두터운 것3.
3.1. 인명으로써
4.

1. 초, 폭탄 등에 쓰이는 실

Wick. 섬유 등의 소재를 사용하여 불을 붙이는 끈, 혹은 을 뜻한다.

Fuse. 촛불의 심지나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따위의 지연신관 등의 심지 등이 대표적이다.

도화선이라 불리기도 한다.

2. 의복 등의 매무새를 잡아주는 두터운 것

의복 등의 소매, 칼라 등에 빳빳한 천이나 플라스틱으로 매무새를 잡아주기 위한 물건을 뜻한다.

3.

마음의 본바탕.

3.1. 인명으로써

신라 후기의 승려로 동화사의 중창조로 알려져 있으며, 실질적인 동화사(桐華寺)의 창건주이다.

삼국유사 심지계조(心地繼祖)에는 심지가 헌덕왕(憲德王)의 아들로 15세에 출가하였다고 한다.

심지는 출가하여 중악(中岳)[1]에 머무르다 속리산 길상사(吉祥寺)의 승려 영심(永深)이 금산사의 고승으로 영심의 스승이기도 한 율사 진표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이어 과증(果證)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법회에 참석하러 찾아갔는데 하필 도착했더니만 기일이 늦어버려 승려로써 참례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에 주저앉아서 땅을 치며 아쉬워하다 승려가 아닌 신도들을 따라 들어가야 했다.

심지가 법회에 참석한지 이레가 지나서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렸는데, 놀랍게도 심지가 서 있는 자리 주위로 사방 10척 정도 공간에서는 그 많은 눈들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며 심지에게 "기한에 늦긴 했어도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니 당으로 들어오시라"고 했지만, 심지는 자기를 낮추고 병을 핑계로 방 안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당을 향해 몰래 예를 올렸다. [2]

법회가 끝나고 심지는 공산으로 돌아오는데 도중에 보니 간자 두 개가 자신의 옷섶 사이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 영심에게 말했다. 영심은 "진표 율사의 간자는 내가 함에 넣고 봉해 놨는데 어떻게 그게 네 옷에 붙었다는 거냐"며 함을 열어 봤는데, 놀랍게도 함에는 간자 두 개가 빠져 있었으며, 영심 자신이 봉해 놓은 것은 누가 뜯은 흔적도 없었다. 영심은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 거듭 싸서 보관하였으나, 이번에도 심지의 옷자락에 그 간자가 붙어 있는 것이었다. 심지가 다시 가서 이를 알리자, 영심은 “부처의 뜻이 너에게 있는 것 같다. 네가 가지고 가서 모시라”며 그 간자를 심지에게 주었다.

심지가 간자를 정수리에 이고 공산으로 돌아가자 공산의 산신이 두 선자(仙子)를 데리고 심지를 맞이하여 산꼭대기에 이르러, 심지를 바위 위에 앉히고 바위 아래에서 심지로부터 계를 받았다. 심지는 “지금 땅을 택해서 성간(聖簡)을 봉안하고자 하는데 우리들이 능히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세 선인과 함께 높이 올라가 간자를 던져서 점을 쳐보자”고 하고는, 신들과 공산 꼭대기에 올라 서쪽을 향해 던지니 간자가 바람에 날려 날아갔다. 심지가 날린 간자는 어느 숲의 우물 속에서 발견되었고, 심지는 그 땅에 강당을 지어 간자를 안치하였다. 이것이 동화사이다. [3]

삼국유사에는 심지가 영심으로부터 전달받은 두 개의 간자는 제8, 제9간자로, 고려 예종이 한번 개경의 대궐로 가져오게 해서 대궐에서 법회를 열어 공경했는데, 그때 두 개 중에 하나(제9간자)를 잃어버려서 상아로 모조품을 만들어서 동화사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무렵까지 전해지고 있었는데 색이 변해서 어느 것이 예종이 만들게 한 새 간자이고 어느 것이 원래 있던 오래된 간자인지를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전해지지도 않는다.

4.

마음에 품은 의지.

[1] 지금의 팔공산이다.[2] 삼국유사에는 이때 심지의 팔꿈치와 이마에서 모두 피가 흘러 진표가 선계산에서 고행하던 때와 비슷하였으며, 지장보살이 날마다 와서 위문하였다고 한다.[3]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동화사 참당(籤堂)의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때 심지가 던진 간자가 발견된 그 우물이라고 썼는데, 지금은 그 우물 자리에 금당암이라는 암자가 들어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