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덕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응두
성명 | 신응두(申應斗) |
생몰 | [? ~ 1908년 7월 |
출생지 | 평안남도 양덕군 오강 |
사망지 | 함경남도 고원군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신응두는 평안남도 양덕군 오강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 그는 1908년경 의병을 일으킨 뒤 부하 40명을 거느리고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수행하다 108년 7월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 도중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신응두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안동시 출신 독립운동가, 신응두
성명 | 신응두(申應斗) |
생몰 | 1891년 3월 2일 ~ 1945년 5월 10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안동군 녹전면 구송리 |
사망지 | 경상북도 안동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신응두는 1891년 3월 2일 경상북도 안동군 녹전면 구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1일 밤 9시경 예안면장 신상면 및 신동희·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백남학(白南鶴)·이광호(李洸鎬) 등과 함께 면사무소 숙직실에 모여, 예안면 장날인 3월 17일을 만세시위 거사일로 결정했다. 이후 거사 당일인 3월 17일 오후 3시 30분 경, 장터에는 다른 장날과는 달리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장꾼으로 위장하고 모여들었다.
이때 신응두는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선언서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 준 뒤, 30여 명의 주도자들과 함께 면사무소 뒷산인 선성산에 올라가 일본인들이 세워놓은 대전기념비(大典記念碑)를 쓰러뜨린 후,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장터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것을 신호로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를 행진했다. 그러나 일제 헌병대의 무차별 발포로 군중은 해산되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안동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5년 5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신응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