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인 야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스티브 호지(야구선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스티브 호지의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둘러보기 틀 모음 | |||
개인 수상 | ||||
| ||||
베스트팀 | ||||
|
잉글랜드의 축구 감독 | ||
<colbgcolor=#eeeeee> 이름 | <colbgcolor=#fff,#1F2023> 스티브 호지 Steve Hodge | |
본명 | 스티븐 브라이언 호지 Stephen Brian Hodge | |
출생 | 1962년 10월 25일 ([age(1962-10-25)]세) | |
잉글랜드 이스트 미들랜즈 노팅엄셔주 노팅엄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73cm | |
직업 |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 선수 | 노팅엄 포레스트 FC (1980~1985) 아스톤 빌라 FC (1985~1986) 토트넘 홋스퍼 FC (1986~1988) 노팅엄 포레스트 FC (1988~1991)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1~1994) → 더비 카운티 FC (1994 / 임대)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1994~1995) 왓포드 FC (1995~1996) 레이턴 오리엔트 FC (1997~1998) |
감독 | 노츠 카운티 FC (2013 / 아카데미 매니저 ) 노츠 카운티 FC (2013 / 임시감독) | |
국가대표 | 24경기 (잉글랜드 / 1986~1991) |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2. 경력
2.1. 선수 경력
2.1.1. 클럽 경력
2.1.1.1. 노팅엄 포레스트 FC
노팅엄에서 태어나 자신의 소년 시절 팀인 노팅엄 포레스트에 1980년 견습 선수로 합류해, 1981-82 시즌 마지막 날 입스위치 타운과의 경기에서 데뷔했다.포레스트의 감독 브라이언 클러프의 총애를 받으며, 호지는 두 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끌었던 팀이 노쇠화되고 리빌딩 되는 과정에서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다. 호지는 포레스트가 리그에서 위치를 공고히 하는 동안 미드필더로서 자주 득점을 올렸지만, 1984년 UEFA컵 준결승에서 RSC 안데를레흐트에게 논란 속에 패한 것 외에는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1985년 여름, 포레스트는 아스톤 빌라 FC로부터의 45만 파운드 제의를 수락했고, 호지는 이스트 미들랜즈를 떠나 웨스트 미들랜즈로 이적했다.
2.1.1.2. 아스톤 빌라 FC
초반에는 잘 풀리는 듯했지만, 팀이 쇠퇴하면서 호지는 잉글랜드 대표팀에 발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 팬들 사이에서 팀에 완전히 헌신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받기 시작했다. 이는 노리치 시티와의 홈 경기에서의 4-1 패배 때 호지가 케빈 풀에게 의도한 백패스가 노리치 선수에게 골로 연결된 사건으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경기장에서 울려 퍼진 야유는 그의 빌라 생활의 종말을 알렸다. 1986년 12월, 호지는 65만 파운드에 토트넘으로 이적했다.2.1.1.3. 토트넘 홋스퍼 FC
토트넘 감독 데이비드 플리트는 호지를 활기찬 공격적인 5인 미드필드의 왼쪽에 배치했고, 그 미드필드는 잉글랜드 대표팀 동료 호들, 크리스 와들, 아르헨티나 베테랑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그리고 열심히 뛰는 폴 앨런이 포함되었다. 이들 모두는 주요 공격수 클라이브 앨런 뒤에서 골과 어시스트를 기여해야 했고, 효과를 발휘했다. 호지는 1986년 12월 26일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데뷔하며 골을 기록했고, 그 이후로도 세 번 더 골을 넣으며 많은 어시스트를 제공했다. 토트넘은 세 개의 트로피를 노렸지만, 아스널에게 리그컵 준결승에서 패하고, 리그 우승 경쟁에서도 밀려 3위를 차지했으며, 1987년 FA컵 결승에서 코번트리 시티에게 패했다.2.1.1.4. 노팅엄 포레스트 FC
클러프는 55만 파운드에 호지를 다시 노팅엄 포레스트로 데려왔다. 클럽은 1989년 풀 멤버스 컵을 우승하고, 리그 컵 결승에 진출해 루턴 타운을 3-1로 꺾고 우승했다. 호지는 깊은 곳에서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페널티를 얻어내어 나이젤 클러프가 골을 넣도록 해주었다. 일주일 후, 호지는 힐스버러 참사의 초기 몇 분 동안 끔찍한 경험을 해야 했다. 재경기에서 리버풀에게 3-1로 패했다.다음 시즌, 호지는 포레스트가 리그 컵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지만, 로이 킨이 등장하면서 주전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1991년 FA컵 결승에서 그는 교체 선수로 나왔지만, 토트넘 홋스퍼에게 연장전 끝에 2-1로 패했다.
2.1.1.5.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1년 여름, 호지는 90만 파운드에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그는 엘런드 로드에서 정규 선발로 자리 잡지 못했지만, 1991-92 시즌 리그 우승 팀에 기여하며 챔피언십 메달을 획득했다. 그 시즌에 그는 23경기에서 7골을 넣었고,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1-0 승리를 포함하여 두 번의 두 골을 기록했다. 1994년 호지는 더비 카운티로 임대되었다.1994년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이적하여 두 시즌 동안 15경기만 뛰었다. 그 후 왓퍼드로 이적해 1995-96 시즌에 두 번 출전했다.
1996년 가을, 월솔에서 실패한 시험과 홍콩에서의 짧은 활동 후, 호지는 1998년 3월 레이턴 오리엔트에 합류하여 한 경기를 뛴 후 시즌이 끝날 때 은퇴했다.
2.1.2. 국가대표 경력
비록 보비 롭슨이 1986년 FIFA 월드컵 대표팀을 발표할 때 호지는 국제 경력에서 단 세 번의 출전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에 자리를 얻었다. 그는 포르투갈과 모로코와의 첫 두 조별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출전했으며, 각각 패배와 무승부를 기록했다. 폴란드와의 마지막 조별 경기에서 롭슨은 급하게 변화를 주었고, 호지는 뛰어난 개인적인 활약을 펼치며 팀의 압도적인 승리를 도왔다. 호지의 왼쪽 윙에서의 멋진 크로스는 개리 리네커의 해트트릭 두 번째 골로 이어져, 잉글랜드가 2라운드로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2라운드에서 잉글랜드는 파라과이와 맞붙었고, 글렌 호들의 넘긴 공을 슬라이딩하며 받아낸 호지는 리네커가 쉽게 득점할 수 있도록 도왔다. 잉글랜드는 다시 한 번 3-0으로 승리했으며, 8강에서 아르헨티나와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호지는 마라도나의 '신의 손' 골을 실수로 어시스트하면서 축구 역사에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경기 후 마라도나의 10번 셔츠를 기념으로 얻었으며, 이 셔츠는 현재 맨체스터의 국립 축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호지는 잉글랜드가 1988년 유럽 선수권 대회를 위한 예선 캠페인을 시작할 때 북아일랜드와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한 승리에서 팀의 자리를 유지했지만, 본선 팀에는 선발되지 않았다.
롭슨은 유럽 선수권 대회 이후 첫 경기에서 호지를 다시 소집했는데, 이는 그가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잠시나마 좋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다시 국가대표팀에서 멀어졌지만, 클럽에서의 활약이 크게 향상되면서 롭슨의 소집 명단에 자주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출전 기회는 많지 않았다.
1990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웸블리에서 열린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강력한 교체 출전을 통해 잉글랜드의 자리를 다시 확보했다. 호지는 대회 자체를 앞두고 열린 마지막 네 번의 워밍업 경기에서 출전했다. 결국 호지는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부상을 당해 대회 동안 잉글랜드의 필드 플레이어 중 유일하게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3위 결정전에서도 출전하지 못했다.
롭슨이 월드컵 이후 사임하고 그의 후임 그레이엄 테일러가 처음에는 호지를 선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초 카메룬과의 2-0 승리 경기에서 테일러는 호지를 다시 불렀고, 1992년 유럽 선수권 대회 예선에서 터키를 1-0으로 이긴 경기에서 그의 24번째이자 마지막 국가대표 출전을 기록했다.
2.2. 감독 경력
3. 기록
3.1. 대회 기록
- 노팅엄 포레스트 FC (1980~1985, 1990~1991)
- EFL컵: 1988-89, 1989-90
-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1~1994)
- 프리미어리그: 1991-92
- FA 커뮤니티 실드: 1992
3.2. 개인 수상
- 노팅엄 포레스트 FC 올해의 선수: 1982-83
- PFA 올해의 팀: 1989-90
4. 여담
* 디에고 마라도나의 신의 손 장면에서 입은 유니폼을 교환했었다.
* 마라도나가 2020년 11월에 사망한 후, 호지는 1986년 월드컵 8강전 종료 후 마라도나와 교환했던 셔츠를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요청을 받았다. 호지는 "그것은 판매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팔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호지는 2022년 4월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경매 회사 소더비를 통해 셔츠를 판매할 적절한 시기라고 말했다.
- 셔츠 판매가 발표된 후, 마라도나의 딸 달마와 전 부인 클라우디아는 그 셔츠가 마라도나가 두 골을 넣은 경기에서 입었던 셔츠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더비는 포토 레졸루션 이미지를 사용해 셔츠의 진위를 확인하고, 마라도나가 경기 후 터널에서 호지에게 셔츠를 준 후 탈의실로 돌아갔다고 밝힌 자서전을 참조해 이 주장을 반박했다. 2022년 5월, 이 셔츠는 스포츠 이벤트 중에 입었던 셔츠 중 최고가인 710만 파운드에 판매되었다.
- 2010년 “마라도나의 셔츠를 가진 남자”라느 자서전을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