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손공린(孫公璘) |
이명 | 손형(孫爀), 손혁(孫赫), 손공린(孫公麟) |
생몰 | 1899년 11월 14일 ~ 1966년 3월 30일 |
출생지 |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승평리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매장지 |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136호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손공린은 1899년 11월 14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승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로 상경해 서울 중앙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통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후 3월 14일 동교생 이남두(李南斗)로부터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시위운동 기사 등이 실린 <독립신문> 60매를 받고 적선동과 체부동 등의 주택에 배포하거나 행인들에게 나눠줬다. 그러다가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했지만 5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를 제기했지만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9월 23일로 감형되어, 같은 해 4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으며, 1927년 2월 7일 칙령 제11호에 의거하여 사면되었다.1921년 7월, 손공린은 조선학생대회에서 주최한 지방순회강연단(地方巡廻講演團)의 제2단에 연설자로 참여했다. 조선학생대회는 1920년 5월 조선학생의 친목과 단결 도모, 조선물산의 장려 및 지방열 타파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전국적인 학생단체로서, 전국에서 회원이 20,000명에 달했다. 그는 1921년 8월 2일 전라남도 나주군에서 <동정(同情)과 사활(死活)>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더 중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치안 방해'를 적용받고 나주경찰서 유치장에서 14일간 구류되었다. 이후 1922년 1월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학생대회 대표로 참석했으며, 1922년 10월 19일부터 23일까지 러시아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통합대회에 경기도 위원회 소속으로 참석했고,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12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1925년 9월 20일 ‘조선의 산업 및 경제·정치적 혁명’에 주안점을 두고 창립된 조선노동당에서 간부로 선임되었고, 일본으로 유학간 뒤인 1926년 9월 말 도쿄에서 사회주의 계통의 잡지 <광선(光線)>을 발행했으며, 1927년 1월 19일 조선노동당에서 <정우회(正友會) 선언>을 반대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새로 간부진을 선임할 때 문부(文部) 담당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고, 같은 해 5월 1일 조선노동당의 메이데이 기념강연에서 연설했다. 이후 5월 26일 이남두의 후임으로 경성무산청년회 상무위원 및 연구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927년 당시 잡지 '부녀세계(婦女世界)' 기자로도 활동했다. 이후 그는 조선노동당을 대표해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했으며, 129년 1월 제3회 임시대회에서는 간사후보장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실제로 간사로 임명되지는 못했다.
1929년 4월, 손공린은 조선상공영화뉴스사를 창립하여 영화 제작 등을 추진했으며, 그 산하에 ‘남선활동사진촬영대(南鮮活動寫眞撮影隊)’를 조직해 지방을 순례하며 촬영했다. 1930년에는 동아영화뉴스사를 만들어 시사영화를 제작했으며, 이후 부산으로 내려가 <상공시보(商工時報)> 경남지사장을 역임했고, 1933년경 경상남도 함천군 등지를 오가며 광고를 모집했다가 고령경찰서에 체포되어 며칠간 조사받았다. 이후 일제의 압력이 거세지고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히자 자택에 은거했고, 8.15 광복 후에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6년 3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손공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26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136호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