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 |
출생 | 1880년 9월 26일 |
독일 제국 헤센주 비스바덴 | |
사망 | 1934년 6월 26일(53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남장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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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조선인을 위해 헌신한 독일계 미국인 간호사.
1. 생애
1.1. 어린 시절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 프랑켄에서 태어났다. 3세일 때 어머니가 미국 뉴욕으로 홀로 이민가고, 조부모에게 맡겨진다. 9세에 할머니를 잃고, 주소가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 엄마를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가톨릭 미션 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성 마르코 병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다. 뉴욕시립병원 실습하던 중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개신교로의 전향을 결심한다.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간호전문학교 졸업후 브루클린주 이시병원에서 근무한다.1904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에서 1년 동안 봉사하였다. 1911년 졸업 이후 동료 선교사에게서 조선에 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길에 버려질 정도라서 의료 봉사가 절실하다는 말을 듣고, 한국 선교를 지원한다.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모집에 지원하여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어머니의 신앙인 가톨릭을 따르지 않고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다. 3세 때, 10대 때, 마지막으로 40대에 어머니에게 모두 세 차례 버림당한다. 어린 시절이 불우했지만 바람, 햇살, 숲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했다.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1.2. 선교사 생활
1912년 2월 20일 한국으로 파송된다. 여객선 S.S.Korea호를 타고 20여 일 여행 끝에 한국에 도착한다. 광주 선교부 제중원(원장 우월순)[1]의 간호사로서 병원과 주일학교를 돕는다. 한국어를 배우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었으며,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온전한 조선인이 되고자 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생 가족처럼 지낸 입양아로 박해라, 문안식, 문천식이 있다.32세인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사망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점령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의 궁핍한 지역을 중심으로 제주와 추자도 등에서 간호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많은 사람을 보살폈다. ‘나환자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였다. 임금 대부분을 빈민과 병자, 여성을 위해 사용했다. 입양하여 키운 고아가 14명, 오갈 곳 없는 과부를 가족처럼 품어 집에서 같이 지낸 사람이 38명이다.
광주 양림동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양잠업을 지도했다. 뽕나무를 더 심고 시설을 세우기 위해 미국에 기금을 요청했다. 제주에서는 여성의 자립을 위해 고사리 채취를 도왔다. 임종 때에는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부하였다. 장례에 자신의 세운 이일학교의 학생이 운구 행렬을 이루고 그 뒤로 수많은 여성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2]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묘소는 선교사들의 거주지이던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