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4 19:03:15

새러토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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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트럼불 작, 버고인 장군의 항복.

Battles of Saratoga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3.2. 영국군
4. 전투 경과
4.1. 프리먼 농장 전투4.2. 전간기4.3. 배미스 고지 전투4.4. 영국군의 항복
5. 결과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7년 9월 19일 ~ 10월 7일 뉴욕 주 새러토가 일대에서 대륙군과 영국군이 맞붙은 전투. 대륙군은 이 전투에서 영국군과 맞선 이래 가장 큰 승리를 거뒀으며,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의 열강들은 이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북미 식민지 독립세력을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2. 배경

1777년 초, 런던의 영국 정부는 캐나다 방면 영국군을 챔플레인 호수를 거쳐 뉴저지 주로 진군시켜서 영국에 반항적인 뉴잉글랜드를 고립시키는 계획을 고안했다. 캐나다 총독 가이 칼튼 경은 1775년 대륙군이 캐나다를 침공했을 때 성공적으로 막아낸 전적이 있었기에 이번 임무에 적합한 인사로 여겨졌지만, 북미 식민지 문제 전쟁장관 조지 사크빌은 칼튼 경의 부관 존 버고인 소장을 캐나다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후 다수의 영국 및 브라운슈바이크 연대가 캐나다로 파견되어 현지에 주둔한 영국군과 합세해 공세를 개시할 준비를 갖추었다.

사크빌은 버고인 소장이 챔플레인 호수를 거쳐 티콘데로가 요새를 점령한 뒤 허드슨 강을 거슬러 내려가길 바랐다. 버고인은 뉴욕에 주둔한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 소장이 뉴욕에서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자신과 합세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사크빌은 단독으로 미국 독립 세력의 중심지인 필라델피아를 공략하겠다는 하우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하우에게 버고인과 가급적 협력하라고 당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지시하지 않았다. 결국 윌리엄 하우 소장은 버고인이 뉴저지 주로 공세를 개시할 때 그를 돕지 않고 뉴욕의 병력을 함선에 실어서 필라델피아로 남하해 버렸다.

버고인은 1777년 6월에 캐나다에서 출발했다. 그는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채플레인 호수에서 올버니로 향했고, 베리 세인트 리저 장군이 이끄는 분견대 2,000명을 모호크 계곡을 통해 남하하여 올버니에서 자신과 합세하게 했다. 이후 그는 7월 초 전쟁 초반 상실했던 티콘데로가 요새를 탈환했다. 그러나 대륙군이 나무를 베고 길을 막았기 때문에 이동이 지연되었고, 보급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했다가 베닝턴 전투에서 대패해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한편 배리 세인트 리저 장군이 이끄는 분견대 2,000명은 모호크 고개를 지나가다가 스탠윅스 요새 공방전을 치렀다. 이에 니콜라스 허키머가 이끄는 뉴욕 민병대 800명이 스탠윅스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왔으나 8월 6일 오리스카니 전투에서 영국군의 매복에 걸려 패퇴하고 허키머는 전사했다. 하지만 그 사이 스탠윅스 요새 수비병들이 자신들을 포위하던 적 숙영지를 습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베네딕트 아놀드가 자신의 병력이 실제보다 훨씬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기만책을 쓰자, 여기에 넘어간 리저 장군은 캐나다로 퇴각했다. 이로 인해 존 버고인 장군은 아무런 증원 병력 없이 적지 한복판에 노출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렇듯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졌지만, 버고인은 공세를 계속 이어가기로 결정하고 허드슨 강을 따라 남하하여 새러토가에 도착한 뒤 그곳에 상당한 요새를 구축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그의 군대는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식량이 매우 부족했고, 사방에서 영국군으로부터 자신들의 고장을 지키려는 민병대가 몰려들고 있었다. 게다가 7월 27일 버고인의 영국군과 함께 하고 있던 인디언들이 뉴저지 주 베드민스터에 거주하고 있던 30대의 평범한 주부 제인 멕클레아를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이 벌어지자 현지 주민들의 영국군에 대한 적대감이 증폭되었고[1], 독립 세력은 "아름답고 깨끗한 숙녀를 참혹하게 죽인 영국군에게 복수하자."며 주민들을 선동해 민병대를 더 많이 끌어모았다. 이에 버고인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9월 19일 베미스 고지의 허드슨 강 서쪽 둑에 주둔한 대륙군 진영으로 접근했다. 이리하여 미국 독립 전쟁의 판도를 결정적으로 뒤집은 새러토가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

3.2. 영국군

  • 지휘관: 존 버고인 소장
  • 지휘관 보좌 : 7대 준남작 프랜시스 클러크 경
  • 부지휘관 : 윌리엄 필립스 소장
  • 부지휘관 : 사이먼 프레이저 준장
  • 부지휘관 : 프리드리히 아돌프 리데젤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파견군 사령관.[2]
  • 병력: 6,000 ~ 7,000명

4. 전투 경과

4.1. 프리먼 농장 전투

1777년 9월 19일, 버고인은 베미스 고지에 주둔한 대륙군의 요새로 진군했다. 그는 고지의 서쪽 측면을 장악한 뒤 거기서 적 요새를 향해 포격을 가해 적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사이먼 프레이저 준장이 이끄는 영국군 우익은 숲으로 진입해 깊은 계곡의 북쪽 측면을 따라 진군했고, 영국군 중앙은 버고인 본인의 지휘하에 요새에 주둔한 대륙군과 대치했으며, 좌익의 헤센 용병대[3]는 리데젤 대령의 지휘 아래 강가에 있는 배들과 보급품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대륙군 총사령관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은 영국군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응하지 않고 요새에서 버티기로 했다. 그러나 아놀드는 영국군의 의도를 눈치채고 별동대를 이끌고 숲을 헤쳐 진군하는 적을 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이츠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아놀드가 끈질기게 설득하자 마침내 그가 약간의 경보병대와 모건의 저격수들을 데려가는 걸 허락했다.

아놀드는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영국에 충성을 맹세한 존 프리먼의 농장에 펼쳐진 들판으로 나아갔다. 모건의 저격수들은 곧 영국군 우익의 선두에서 진군하고 있던 제임스 해밀턴 대령의 부대를 목격했다. 모건은 부하들에게 영국군 장교를 저격하라고 지시했고, 부하들은 명령에 따라 적 장교들을 저격해 다수를 사살시켰다. 이에 해밀턴 대령이 급히 퇴각하자, 모건은 적을 추격했다. 그러나 곧 프레이저의 본대가 나타나자, 모건은 부하들을 이끌고 숲 속으로 숨었다. 이후 아놀드는 추가 병력을 투입해 오후 내내 프리먼 농장을 둘러싸고 영국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아놀드는 게이츠 소장에게 지원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게이츠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아놀드는 이를 거부하고 전투를 계속 이어갔고, 프레이저는 적의 끈질긴 저항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무렵, 리데젤 대령은 후방에서 보급품들을 지키던 중 숲 속에서 총격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걸 보고 아군이 고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서둘러 헤센 용병대를 이끌고 숲을 헤치고 나아가 아놀드의 군대 우측면으로 향했다. 이것을 본 아놀드는 전투를 중지하고 배미스 고지로 후퇴했다. 영국군은 비록 프리먼 농장을 장악하긴 했지만 애초에 목표로 삼았던 고지 장악에 실패했고, 600명의 사상자 및 포로를 기록했다. 반면 대륙군의 손실은 350명이었다.

4.2. 전간기

프리먼 농장 전투 후, 대륙군 내부에서는 호레이쇼 게이츠와 베네딕트 아놀드의 불화가 폭발했다. 이는 게이츠가 프리먼 농장 전투에 관한 보고서를 대륙 의회에 제출할 때 아놀드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아놀드가 이에 대해 항의하자, 게이츠는 그가 자신의 명령을 위반했으니 처벌받아 마땅하다며 그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벤자민 링컨 준장에게 아놀드가 맡았던 부대의 지휘권을 넘겨줬다. 이러한 대우에 분노한 아놀드는 조지 워싱턴 사령부로 이직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하고 막사에 감금당했다.

한편 버고인의 부관들은 프리먼 농장 전투 다음날인 9월 20일에 다시 적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만약 버고인이 이 주장에 따랐다면 아놀드를 부당하게 대우한 게이츠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대륙군이 패배했을 수도 있었지만, 버고인은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오랜 행군으로 지쳤다고 판단하고 이를 거부하고 숙영지에 남아 있기로 했다. 얼마 후, 버고인은 대륙군이 조지 호숫가에 있던 아군의 보급 요새를 공략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그는 모든 공세를 중단하고 챔플레인 호숫가에 위치한 티콘데로가 요새로 퇴각하는 걸 고려했다. 그러나 헨리 클린턴 소장으로부터 "아군이 곧 뉴욕에서 출발해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며 10일 안에 몽고메리 요새를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편지를 접수한 버고인은 해밀턴과 합세할 때까지 새러토가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버고인은 9월 23일 클린턴에게 편지를 보내 서둘러 자신과 합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클린턴은 10월 3일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뉴욕에서 출발해 10월 6일 몽고메리 요새를 공략했다. 클린턴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세 명의 전령을 버고인에게 파견했지만, 버고인은 이 전령들이 모두 대륙군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클린턴의 승리 소식을 전해듣지 못했다. 클린턴은 대륙군이 허드슨 강에 설치한 쇠사슬을 풀고 10월 16일 리빙스턴 일대까지 이르렀지만, 이스라엘 퍼트넘 소장이 이끄는 민병대의 역습을 받고 후퇴했다. 그 후 클린턴은 10월 17일 윌리엄 하우 장군으로부터 필라델피아로 와서 자신을 도우라는 지령을 받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리하여 버고인은 아군의 구원을 받을 기회를 영영 상실하고 적지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4.3. 배미스 고지 전투

10월 7일, 버고인은 전쟁 협의회를 소집해 앞으로 어찌할 지를 논의했다. 프레이저 준장과 리데젤 대령은 아군이 오랫동안 보급을 받지 못해 기아에 시달려서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병력이 6천 명도 채 되지 않는 반면 적의 숫자는 갈수록 불어나고 있으니 퇴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버고인은 클린턴이 아군을 구하고자 오고 있으니 안된다며 거부하고 미국 좌익에 대한 정찰을 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프레이저는 1,500명의 경보병대를 이끌고 프리먼 농장에서 배미스 고지로 올라가 바버 휘트필드로 진군했다가 모건의 라이플 부대 및 에녹 푸어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 여단과 마주쳤다. 모건은 즉시 영국군 우익에 배치된 경보병대를 공격했고, 푸어 장군은 영국군 좌익 척탄병들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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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당한 채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아놀드.

이때 숙소에 감금되어 있던 베네딕트 아놀드는 총격 소리를 듣고 뛰쳐나와 병사들을 친히 지휘했다. 반면 호레이쇼 게이츠는 전투 내내 숙소에 남아 있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던 중, 프레이저 장군이 병사들을 수습하려던 중 가슴에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4] 지휘관을 잃은 영국군은 서둘러 퇴각했고, 아놀드는 앞장서서 적을 추격하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 부관이 어디 다친 곳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다리에 맞았다. 차라리 심장에 맞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전투가 끝난 뒤, 버고인은 병사들을 수습한 후 어둠을 틈타 철수시켜 10월 8일 아침에 요새화된 위치로 돌아왔다. 그 후 대륙군은 1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영국군 진영을 완전히 포위했다. 이제 버고인에게 남은 선택은 단 두 가지, 즉 이대로 굶어죽거나 항복하는 것 뿐이었다.

4.4. 영국군의 항복

10월 13일, 버고인은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 평의회를 열어 적에게 항복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리데젤 대령은 무기를 내려놓고 캐나다로 돌아가는 조건을 걸고 항복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버고인은 적군이 그걸 용인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하고 대신 보스턴 항을 거쳐 유럽으로 돌아가는 조건을 제시하기로 했다. 이후 며칠간의 협상 끝에, 게이츠는 버고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10월 17일, 버고인은 병사 및 장교들과 함께 게이츠에게 항복했다. 버고인은 자신의 검을 게이츠에게 바쳤지만 게이츠는 이를 받지 않고 버고인에게 돌려줬다. 이후 영국군은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다시는 대륙군을 상대로 싸우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버고인은 약속대로 영국으로 돌려보내졌지만, 병사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륙 의회에 의해 연금되었다.

5. 결과

영국군은 440명이 전사하고 690명이 부상당했으며 6,000여 명이 항복했다. 반면 대륙군의 손실은 90명 전사, 240명 부상에 그쳤다.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의 열강들은 새러토가 전투 이후 미국 독립 세력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과 함께 영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즉 이 전투로 인해 영국은 미국의 '반란'을 진압할 기회를 완전히 놓쳤으며, 사실상 미국과의 전면 '전쟁'을 벌이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열강들과도 전쟁을 벌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베네딕트 아놀드는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지만 정작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로는 호레이쇼 게이츠가 독차지하는 바람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호레이쇼 게이츠는 조지 워싱턴을 밀어내고 자신이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하려는 음모에 가담했지만, 1780년 남부 주를 침공한 영국군과 맞서 치른 캠던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뒤 다시는 군대를 지휘하지 못했다. 반면 아놀드는 1778년 필라델피아 군정장관으로 부임했으나 부패 혐의에 시달리다 1780년 웨스트 포인트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 영국군에게 웨스트 포인트를 넘겨주려 하다가 발각당하자 영국군에 투항했다. 그 후 아놀드는 새러토가의 영웅에서 미국의 반역자로 전락했고 오랜 세월 미국인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1] 제인 멕클레아는 영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한 데이비드 존스의 약혼자였다. 이 때문에 영국에 충성하던 주민들은 제인 멕클레아 살인 사건 이후로 영국군에게 등을 돌렸다. 버고인 장군이 제인을 살해한 인디언들을 처벌했다면 그나마 사정이 나아졌겠지만, 그들을 처벌할 경우 다른 인디언들이 이탈할 지도 모른다는 장교들의 조언을 들은 버고인이 그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현지의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2] 브라운슈바이크 출신으로 독일 용병대를 지휘했다.[3] 사실 헤센 출신이 아니고 브라운슈바이크 출신의 군대였지만 당시에는 이미 들어와서 활약하던 헤센 군대를 독일인 용병의 대명사로 통칭해서 불렀다. 이 독일인 용병들은 헤센-카셀, 헤센-하나우, 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 등등 남독일 출신들이 많이 포함됐다.[4] 이때 프레이저 준장을 저격한 인물은 대륙군 소속 티모시 달튼 상병으로 저격당시 그는 프레이저 준장으로부터 274m나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