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1 12:45:02

보비아눔 전투


삼니움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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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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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삼니움 전쟁 시기인 기원전 305년, 로마군이 삼니움군을 격파한 전투. 제2차 삼니움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다.

2. 상세

기원전 306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비나는 삼니움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삼니움인들이 진군하는 로마군을 잇따라 습격해 타격을 입힌 데다 보급로를 차단해버려서 곤경에 처했다. 이때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헤르니키인들을 복종시킨 동료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트레물루스가 그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고, 두 집정관은 보급로를 차단한 삼니움군을 협공해 수많은 이들을 살육했다. 그러나 삼니움인들은 캄파니아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등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다.

기원전 305년, 로마는 삼니움을 굴복시키기 위한 최종 공세를 개시했다.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는 티페르눔으로 진격했고, 동료 집정관 티베리우스 미누키우스 아우구리누스는 삼니움 네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인 펜트리 족의 수도인 보비아눔으로 행진했다. 티페르눔에 진격한 메겔루스는 삼니움인과의 전투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인근의 고지에 숙영지를 세우고 삼니움군과 대치했다. 그러다가 야밤에 적이 방심하는 틈을 타 숙영지에 수비대를 남겨둔 뒤 나머지 병사들을 이끌고 동료 집정관이 있는 보비아눔으로 강행군했다. 그러면서 아우구리누스에게 자신이 가고 있으니 어서 전투를 개시하라고 독촉하는 서신을 보냈다.

아우구리누스는 서신을 받는 즉시 군대를 출격시켜 대치 중이던 삼니움군과 교전했다. 전투는 늦은 오후까지 이어졌지만 양측 모두 비슷한 사상자만 거둘 뿐 승패가 좀처럼 갈리지 않았다. 이때 메겔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전장에 등장하자, 삼니움인들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다. 로마군은 그런 삼니움인들을 몰아쳐 섬멸한 뒤 다음날 보비아눔을 포위 공격해 순식간에 함락했다. 리비우스는 한 기록에는 두 집정관이 보비아눔을 공략한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밝혔지만, 다른 기록에는 아우구리누스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고 마르쿠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파이티누스가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되어 메겔루스와 함께 보비아눔을 공략했다고 서술되었다고 설명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는 <개선장군 목록>에서 마르쿠스 풀비우스 쿠르부스 파이티누스가 삼니움 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 개선식을 거행한 사실만 기재되었을 뿐 아우구리누스가 개선식을 거행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리비우스의 설명대로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메겔루스가 개선식을 거행했다는 언급은 없는 것을 볼 때, 고대 문헌과는 달리 실제로는 삼니움을 상대로 큰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파이티누스의 공적만 인정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비아눔 패전 소식은 삼니움 전역에 전해졌고, 삼니움인들은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로마에 평화 협정을 맺자고 요청했다. 로마인들은 삼니움과 오랜 전쟁을 벌이느라 지칠대로 지쳤기 때문에 삼니움인들의 요청에 반색했지만, 끈질기게 저항하던 그들이 진짜로 평화를 원하는 지 의심스러워 집정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를 군대와 함께 삼니움으로 파견했다. 소푸스는 삼니움 전역을 여행하면서 들리는 곳마다 선물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원로원은 소푸스의 보고를 받고 삼니움인들이 비로소 평화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고 확신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이로써 로마와 삼니움의 오랜 협약이 복원되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조건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