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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복스/활동/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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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1집

EQUALIZEHER
1997.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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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 V.O.X II
1998.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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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Come Come Baby
1999.07.21
정규 4집

Why
200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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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5집

Boyish Story
2001.06.14
스페셜 5.5집

Baby V.O.X Special Album
2002.04.24
정규 6집

Devotion
2003.04.03
정규 7집

Ride West
200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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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외활동 가능성 모색2. 4집 활동과 대안티시대3. 대한해협 횡단4. 본격적인 해외 활동5. 종합

1. 해외활동 가능성 모색

3집 활동 끝 무렵 베이비복스는 해외 시장에 조금씩 접근을 하기 시작했는데 한일합작 영화 <건드레스>의 홍보대사로 위축됨과 동시에 영화 주제가 <Patron>을 녹음하면서 일본 시장에 문을 두드렸고 1999년 11월, 중국에서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고 중국 현지에 앨범을 먼저 발표한 베이비복스는 99년 12월 북경 TV의 `밀레니엄쇼'에 출연하면서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1월 4일부터 21일까지 북경 상해 등 주요도시에서 중국프로모션투어로 활동에 시동을 걸었고 이 후 호남위성TV에서 최고의 인기프로인 ‘쾌락대본영’(快樂大本營)의 스페셜코너에 참가,자신들의 히트곡을 열창하며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회사에서는 내수용으로 끝나는 걸그룹이 아닌 해외에서도 사랑받는 그룹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해외 시장 진출을 타진했고 그 시작이 중국이었던것이다. 당시 중국에는 한류붐이란게 일어나기도 전이었던 상황이라 멤버들은 중국 진출을 한다는 얘길 듣고 다들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이제야 고생끝나고 빛좀 보나" 싶었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하니 절망적이었다고. 그리고 돈을 꽤 벌게된다... 현재 중국시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박으로 보이지만 그건 아직 훗날의 이야기였다.

2. 4집 활동과 대안티시대

어쨌든 조금씩 해외로 발을 들이던 베이비복스는 4집 앨범 발표를 위해 다시 한 번 고민하며 신중히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LG에서 제작비를 투자받아 음반 제작에 돌입했으며 전체적인 음악 프로듀서는 그동안 베이비복스의 성공을 도왔던 '은인'과도 같았던 작곡가 김형석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일본에서 아무로 나미에 등을 가르쳤던 톱 안무가 '사쿠마 히로유키'를 섭외해서 타이틀 곡의 안무를 지도 받았으며 무대 의상은 디자이너 이상봉을 섭외해 제작했다. 베이비복스의 손톱에 깃털을 다는 네일아트가 대유행하기도 했다. 가창력부분에 특히 많은 시간을 투자해 강화시켰는데, 코러스계의 대모라고 불리우는 이주연을 노래 스승으로 초빙해 한 달 동안 발성 연습에서부터 창법까지 다시 지도받았다. 이때부터 간미연이 거의 모든 노래의 하이라이트를 가져가게 된다. 지난 앨범들과는 달리 4집 앨범에선 음악성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당시 유명했던 북치기박치기 MC후니훈과의 콜라보, 애니메이션 건드레스 참여 등 색다른 시도를 많이 한 앨범이다. 현재 멜론 명반으로 선정되며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대중들에게 회자되는 앨범이다.

파일:베이비복스_Why.jpg
베이비복스 역대 앨범중 가장 명반으로 평가받는 4집 Why
2000년 5월 16일 발매

why
《Why》 (김형석 작곡, 양재선 작사)

2000년 5월, 약 6개월만에 국내 무대로 컴백한 베이비복스는 2000년 5월 2일 중국 계림에서의 한중 우호의 밤 공연에서 타이틀 곡 <Why>를 중국에서 먼저 선보였다. 이 날 공연은 중국 공영방송인 'CC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위성 생방송되었다. 뮤직비디오 역시 이틀 간 중국의 관광지로 손꼽히는 계림에서 촬영했다. 또한 <Get Up>과 <Killer>에서 파워풀함이 돋보이는 선 굵은 안무로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베이비복스는 <Why>에서 여성의 곡선을 강조하는 화려하고 섬세한 안무로 3집의 '파워풀한 섹시미'에서부터 한 단계 더 진화한 '섬세한 섹시미'를 발산했다. 일본의 안무가 히로유끼가 베이비복스에게 안무를 가르치고 싶다는 제안이 온 것을 계기로 〈Why〉 안무를 직접 만들어주었다.기사 여러모로 〈Why〉는 뮤직비디오는 중국에서 촬영하고 안무는 일본인 안무가가 만들어 주는 등 해외 협업이 많은 곡이었다. 3집으로 인기 탄력을 받은 베이비복스는 4집 음반을 발매한지 보름만에 15만장 이상을 판매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파일:hrVJiaq.jpg

윤은혜 물총테러사건 신문 보도자료'

하지만 <Why>때 선보인 이희진의 금발 스타일을 문제삼아 KBS는‘공영방송’임을 내세워 다른 방송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엄격한 규제를 해왔기 때문에 뮤직뱅크에서는 한동안 출연이 정지되었고 MBC 음악캠프에서 첫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인기가요에서는 2주 뒤에 출연이 성사되면서 방송 프로모션에 지장이 왔다. 거기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5월 25일, 한양대 안산 캠퍼스에서 예정된 경인방송의 <뮤직엔진>에 출연하기 위해 소속사 차안에서 대기하던 중 HOT팬이 쏜 물총에 윤은혜가 눈을 정통으로 맞았다. 열렬한 베이비복스 팬을 자처한 다음 피카츄 인형을 선물하는 척 하면서 갑자기 물총을 꺼내 윤은혜의 눈에 정통으로 쏜 뒤 쏜살같이 달아났고 결국 윤은혜는 각막 손상을 입으며 한동안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파일:ZXunqdr.jpg
Why 활동 모습

타이틀 곡 <Why>는 초반 기세에 비해[1] 그 뒤엔 임팩트가 덜했지만 그럼에도 SBS 인기가요에서는 최고 3위, MBC 음악캠프에서는 4위까지 랭크하면서 선전했다. 3집이 성공적이었기에 인기 아이돌에게는 컴백을 어디서 하냐에 대해 방송국에서는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2000년이다. 7월 경에 <Why>활동을 종료한 베이비복스는 곧이어 걸크러쉬의 끝판왕, 강한 힙합풍의 댄스곡 <배신>으로 후속곡 활동을 재개했다. 이 당시 베이비복스는 H.O.T팬들과 그 팬덤에 붙어서 기생하는 남자 아이돌 팬클럽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소녀시대 텐미닛 사건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될거 같다.)

당시 간미연을 비방하는 글과 테러 위협 메시지를 담은 디스켓에 자신의 이름과 주소 등이 적힌 편지까지 전달하는 등 지속적으로 베이비복스 멤버들을 협박해오던, 경북 울산의 모 고교에 재학 중이던 C모양은 베이비복스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자 '간미연 사건은 자작극'이란 소문을 퍼뜨리며 조직적으로 활동을 방해했다. 3집 활동 때부터 수차례의 테러위협이 있어도 철없는 학생의 소행이거니 하며 그냥 넘겼던 DR 뮤직은, C모양이 자신의 소재까지 밝히며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나와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이후 2000년 7월에 경찰에게 베이비 복스의 협박범으로 잡힌 C모양은 H.O.T.의 여고생 팬이었다. 하지만 베이비복스 측이 어린 학생에게 처벌까지는 원치 않아 사건은 일단락되었고(베이비복스도 학생이었고 윤은혜는 고1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처벌을 했었어야 했지만..) 이 밖에도 안티 팬들은(혹은 에쵸티팬덤) 온라인 상에서도 베이비복스를 공격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안타깝게도 그 팬덤은 지금까지도 어떠한 사과도 안하고 있는 실정이다.

2000년 7월 22일 MBC '음악캠프'에서는 모 남성그룹 팬들과 베이비복스의 팬들이 충돌하는 소동이 벌여졌다. 베이비복스가 무대를 가졌을 때 해당 남성그룹의 팬들과 기타 남성그룹 팬들이 단체로 박자에 맞춰 '꺼져라'라고 외친 것이다. 그날 방송에서 해당 그룹이 1위 후보로 출연한 MBC '음악캠프'에서 해당 팀이 무대에 올라 열정적인 춤과 노래를 선보인 뒤 내려간 뒤 베이비복스가 무대에 오르자마자 해당 남성그룹 팬들을 비롯한 1만여명의 팬들이 단합이라도 했듯이 그녀들을 향해 "꺼져라" 등 심한 야유를 퍼부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졌던 터라 현장의 야유 소리는 그대로 방송전파를 타고 안방극장에서도 흘러나왔다. 그동안 일부 팬들이 특정그룹에 대해 야유를 보낸 적은 있지만 이처럼 모두가 한 그룹에 대해 야유를 보낸 것은 처음이었기에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더욱 안타까운 건 이 날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자신들에게 응원을 하는 줄 알고 생글생글 웃고 있다는 것이다.

음악캠프
2000년 7월 22일 MBC 음악캠프 방송 자료.
베이비복스가 노래를 부르는 내내 연신 꺼져라를 외쳐대고 있다.

이 날 MBC 게시판에는 해당 남성그룹팬들이 베이비복스를 향해 야유의 소리를 질러 생방송에 그대로 나간 점에 대한 책임을 해당 팀에게 물어 그 그룹을 당분간 출연정지 시킨다는 '음악캠프' 측의 글이 올라왔고, 이는 베이비복스에 적대감을 느끼던 해당 남성그룹 팬들의 감정의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공방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베이비복스와 해당 남성그룹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상대 측을 비방하는 글들이 연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올라왔다. 양 측의 비방은 그 수위가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었으며 팬들 사이에 일전을 불사할 듯한 적대적인 멘트가 오가는 가운데 베이비복스와 해당 남성그룹 사이에도 자연스레 냉기류가 흐르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해당 그룹의 팬클럽에서 "꺼져라" 사건을 주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그 사건 이후로 두 그룹이 서로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사실을 확인 해 본 결과 당일 MBC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은 '음악캠프' 측에서 올린 것이 아니었고, 해당 남성그룹의 출연정지 또한 전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그래서 '음악캠프' 팀은 그 날 가수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팬들 때문에 서먹서먹해진 두 팀을 이어줄려는 계획도 했지만 팬들의 분위기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당시 베이비복스 안티 팬들은 대부분 HOT빠순이라고 불리는 무리들이거나 SM소속 혹은 HOT팬클럽 인원 수에 기생하는 무리들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10대 여자 중,고등학생으로 분별력이나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성인에 비해 떨어지고 감정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연령대의 사춘기 소녀들이 주를 이루었기에, 합리적인 이유라거나 자신들의 주관도 없이 그저 주위의 또래 친구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베이비복스의 안티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프로의 정신을 잊지않고 컨셉에 맞는 표정으로 무대를 만들었다. 그 노력으로 4집 후속곡 <배신>은 가요 프로그램에서 4위까지 들면서 사랑을 받았다. 사실 HOT팬덤만 아니었다면 4집은 더 큰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 뒤 소속사는 해외 쪽에서 오는 러브콜에 활발한 활동을 추진했다. 8월 말부터는 해외 프로모션을 시작했는데 우선 중국 청도에서 열린 '세계 맥주 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초청되어 비 지스, 우타다 히카루, 코코리 등 세계적인 스타들과 합동 공연을 펼쳤고 한국 가수로는 '코리아나'가 초청을 받은 이후 베이비복스가 두번째였다고 한다. 이 공연은 중국 CCTV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위성채널을 통하여 방송되었다. 이어서 중국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고 중국 북경 세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유치공연에 참가하였다. 이 공연에는 아시아 8개국의 대표가 초청받았으며, 베이비복스는 한국 대표 자격으로 출전한 것이었다. 당시 공연에서 베이비복스에 대한 중국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연장에 운집한 관중들은 여타 가수들보다 베이비복스가 무대에 오르자 연신 '베이비복스'를 외치며 다른 뮤지션들을 무색케 만들었다. 9월에는 미국 뉴욕과 LA 등지에서 공연을 가졌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앞서 김건모, 김현정, 안재욱, 클론 등과 함께 한국대표팀 응원가를 녹음했다.

3. 대한해협 횡단

파일:rqzCCfM.jpg
SBS 뷰티풀라이프 녹화 당시 모습

2000년 1월 방영된 god의 육아일기는 아이돌 예능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주었고 베이비복스도 대중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는 노력의 일환으로 7월부터 SBS의 예능 프로그램 '뷰티풀라이프'에서 수영선수 조오련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한해협 횡단 프로젝트에 참가했었다. 이 프로젝트는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선수가 단신으로 부산 앞바다에서 대마도까지 횡단에 성공한 후 당시 코치였던 지봉균 감독과 "20년 뒤 다시 도전하자"고 한 약속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2000년 8월 12일 횡단 1차 시도에서 출발 11시간 만에 악천후로 인해 경남 통영시 홍도 앞바다에서 철수해야 했던 베이비복스와 대한해협 횡단 팀은 이번에도 폭우 때문에 거제도에서 사흘 간이나 대기해야 했으나, 8월 28일 오후 1시 거제도를 출발하여 예상보다 무려 6시간이나 단축 된 18시간 20분만인 29일 오전 7시 20분 대마도에 도착했다. 조오련을 시작으로 소지섭, 정유진, 최종원, 유정현, 이훈, 베이비복스등의 연예인 참가자들과 6명의 일반인 참가자들의 릴레이 수영으로 이루어졌던 당시의 대한해협 횡단을 성공시킨 횡단 팀과 베이비복스는 바다의 날씨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끝까지 안심할 수 없었고, '아직도 성공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특히 베이비복스 멤버들은 처음에 물에 뜨지 못했을 정도로 수영을 전혀 못했었기 때문에 횡단 성공은 더욱 뜻깊었다.

두 달 남짓 계속 된 강행군에 멤버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기도 하였다. 7월 한 달 동안 이희진 김이지 윤은혜 등 3명이 잇달아 쓰러지고 8월에 심은진도 병원 신세를 졌다. 심은진은 베이비복스 멤버들과 지방 행사를 돌다가 그만 과로에 탈진 증세를 보여 부산 모 병원 입원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 때문에 일부 방송 프로그램과 대한해협 횡단 팀의 거제도 훈련에는 심은진을 제외한 4명만이 출연했다. 한편 한여름 무더위와 강도 높은 수영 훈련, 빡빡한 스케줄에도 베이비복스 멤버 중에서 유일하게 쓰러지지 않고 끄떡없이 버텨 온 간미연은 강철 같은 체력으로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베이비복스는 대한해협 횡단을 위해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처음에는 두렵고 무서운 마음만 앞섰지만 무사히 횡단을 마친 이후에는 그녀들에게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그녀들이 4집 활동 중 가장 뜻깊었던 일이었다고 한다.

4. 본격적인 해외 활동

10월에 4집 활동을 종료한 베이비복스는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ON AIR WEST LIVE HALL에서 미니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약 2,500여석의 좌석이 모두 매진되었고 팬사인회에서도 많은 팬들이 몰려와 성황리에 첫 일본 프로모션을 마쳤다. 이 후 일본 인터넷 벤처기업 프리맥스와 일본 활동에 관한 매니지먼트 정식계약을 맺었다. 일본의 벤처기업 프리맥스는 당시 세계정복을 목표로 연예관련 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첫 번째 타자로 베이비복스를 낙점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중화권 반응이 워낙 폭발적이기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일본은 당시 인기를 얻으려면 최소한 1년에 싱글 2장 이상, 정규 앨범 1장을 발매해야하는 일본의 시스템을 따라가기에 스케줄이 조정과 중소기업 소속사 재정상 쉽지 않았다. 중국, 홍콩,대만 중화권에 비해 다소 소극적인 플랜이었지만 히트곡 ‘go’ 일본어 버젼이 담긴 싱글앨범, 영상앨범, 일본 NHK방송, 예능출연, 팬클럽 베이비엔젤스JAPAN을 창설하는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다.

같은 해 11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국내 여성그룹으로는 첫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며 중국에서의 원탑 인기를 입증시켰다. 2000년 말에는 초특급 대우를 받고 중국 국영기업체의 CF 모델로 발탁되었고 중국 스포츠웨어 업체인 '뻬뻬지아'와 1억원에 전속 계약을 맺고 CF를 찍었다. 중국 국영기업체 CF에 외국인 모델이 나서기는 아놀드 슈워제네거 이후 베이비복스가 두 번째였으며 1억원은 중국 톱모델급 개런티였다. 베이비복스가 등장한 CF는 2000년 연말부터 중국 TV를 통해 방송되었다. 또, <Why>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던 계림시 측은 베이비복스가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난 후 관광객이 급증하였다며 베이비복스를 계림시 홍보대사로 위축하기도 했다.

5. 종합

2000년 연말, 국내에서 제1회 애견문화인의 상, SBS 서울가요대상 인기상, SBS 가요대전 프로듀서상, KBS 가요대상 본상, KBS 연예 예술 대상 신세대 중창 가요 부문, iTV 한국 연예인 대상 본상 등을 수상하며 4집 활동을 마무리했다. 4집 앨범은 음반산업협회 기준 155,864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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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집의 초반 반응은 3집 그 이상이었다. 4집은 한국음반산업협회 기준으로 발매 첫달 판매량이 3집보다 높았지만 활동 두달째 들어갔을 때 낙폭이 매우 컸다. 무수히 많아진 안티세력의 영향도 있고 방송 활동도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