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07:13:48

유성 원정

백랑산 전투에서 넘어옴
1. 개요2. 개전 배경
2.1. 오환의 상황
3. 원정 준비
3.1. 반대 여론
4. 노룡새로 우회하다5. 백랑산 전투6. 원정의 결과7. 번외
7.1. 노식을 조문하다7.2. 조조의 보출하문행7.3. 조식의 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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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7년, 후한 말기의 군벌 조조가 북방 원정을 감행해 답돈 등이 이끄는 오환족 연합을 격파한 전투로, 백랑산 전투로도 불린다.
건안 12년(207) 가을 8월, 조조(曹操)가 유성(柳城)에서 오환(烏桓)을 대파하고 답돈(蹋頓)을 참(斬)했다.
『후한서』 「효헌제기」

2. 개전 배경

삼군(三郡)의 오환(烏丸)이 천하가 어지러워진 것을 틈타 유주(幽州)를 격파하고 한민(漢民-한나라 백성) 10여 만 호를 약탈해 소유했다. 원소는 그 추호(酋豪)들을 세워 선우(單于)로 삼고, 가인(家人)의 자식을 자기 딸로 삼아 그들에게 처로 주었다. 요서(遼西) 선우 답돈(蹋頓)이 특히 강성하여 원소에게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원상 형제들이 그에게 귀의했고 수차례 새(塞) 안으로 들어와 해를 끼쳤다.
『삼국지』 「무제기」

원상, 원희 형제가 합류한 오환이 혼란기를 틈타 장성을 넘어 유주를 노략질하고 백성을 빼앗자, 조조는 이들을 토벌해 복속시켜 후환을 제거하고, 동시에 인력 자원으로 편입할 계획을 세웠다.

2.1. 오환의 상황

답돈은 꾀가 많고 지모가 있었다. 광양(廣陽) 사람인 염유(閻柔)는 어려서 오환, 선비에게로 들어갔다 그들에게 신임을 얻었다. 이에 염유는 선비 무리들의 힘을 빌려 오환교위 형거(邢擧)를 죽이고 그를 대신했는데, 원소는 그를 총애하고 위로해 북변을 안정시켰다. 그 뒤 원상이 패하여 답돈에게로 달아나니 답돈의 세력에 의지해 다시 기주를 도모하려 했다. 때마침 태조(太祖-조조)가 하북을 평정하자 염유는 선비, 오환을 이끌고 태조에게 귀부했고, 이에 염유를 교위로 임명하고 한(漢)의 사절(使節)을 지닌 채 예전처럼 광녕(廣甯)을 다스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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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오환전」
건안(建安) 년간(196~219) 초기에 기주목(冀州牧) 원소(袁紹)와 전장군(前將軍) 공손찬(公孫瓚)이 서로 대치하여 [싸웠으나]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자 답돈이 사신으로 하여금 원소를 방문하도록 하여 화친하기를 구하였고 마침내 군대를 보내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는 것을 도왔다. 원소는 황제의 문서[制]를 위조하여 답돈과 난루, 소복연, 오연 등에게 모두 선우의 인수(印綬)를 하사하였다. 후에 난루와 소복연이 부중을 이끌고 누반을 받들어 선우로 삼자 답돈은 왕이 되었지만, 답돈은 여전히 계교와 방책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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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오환열전」

오환(烏丸)은 북쪽의 선비족과 남쪽의 중국 사이에 낀 채로 유주 변경에 살던 민족으로, 묵돌선우에게 복속된 적도 있었으나 전한 말이면 한나라에 느슨하게 복속되어 있었다. 약 50년 경부터 호오환교위가 임명되어 유주 북방의 오환, 선비와의 교섭을 주관했고, 중앙군인 북군의 오교위 중 장수교위는 오환 기병들을 통솔했다. 일종의 북방 포에데라티 역할을 한 오환은 107년의 강족 대반란으로 후한이 약화되며 점차 통제 밖으로 벗어난다. 처참하게 실패한 177년 단석괴 토벌전과 184년 황건적의 난은 한나라가 약화되었단 확실한 신호였고, 장온이 량주 반란 토벌을 위해 오환돌기 3천 명을 징발하였으나 품삯과 군량을 지급하지 않자 이들은 탈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87년, 장순과 장거가 주도한 오환족의 반란이 우북평, 요서, 요동 삼군을 휩쓸고 호오환교위 공기조를 죽였다. 188년 유주목으로 부임한 유우와 휘하의 공손찬이 반란을 진정시켰으나, 193년 공손찬이 유우를 죽이고 195년에 본인도 축출되며 유주는 오환족이 각자도생하는 할거의 자리가 되었다.

개중에서 족장 구력거의 조카 답돈 등은 원소에게 선우의 인수를 받고 혼인동맹으로 엮였다. 원상, 원희는 205년 조조에게 격파된 후 답돈에게 도망쳤다. 원씨 형제의 합류로 세력과 위신을 불린 답돈은 약 20-30만여의 군세를 동원해 남쪽으로 일련의 약탈전을 전개했다.

답돈은 묵돌, 단석괴의 전철을 따라가려 한다는 일부 소문과는 달리 안정적인 연합을 이끄는 위치는 아니었다. 따라서 조조의 패권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은 아니었고, 원씨가 답돈의 지원으로 기주를 수복할 가능성도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오환족을 다시 평정해야만 북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조조는 빠르고 결정적인 타격을 결심했다. [1]

3. 원정 준비

조조는 평로거, 천주거라는 두 운하를 파서 본진 삼은 업에서부터 고수를 따라 해안까지, 해안을 따라 동북쪽 변경까지 수로 보급로를 형성했다. 이는 척박한 북방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전할 수 있게 했다.
공이 이를 장차 정벌하고자 하여, 수로를 뚫어 호타(呼沱)로부터 고수(泒水)로 들어가게 하고 이를 평로거(平虜渠)라 명명했다. 또한 구하(泃河) 입구로부터 로하(潞河)로 들어가게 해 천주거(泉州渠)라 명명하고 바다로 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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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무제기」
나중에 원상(袁尙)이 북방의 오환족(烏丸) 답돈(蹋頓)에게 귀의하자 태조는 그를 정벌하고자 했다. 당시 군량을 운송하기 어려운 것을 걱정하여 평로(平盧)와 천주(泉州) 두 도랑을 파서 바다로부터 통하게 하였는데, 이것도 동소가 건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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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동소전」

원소의 항장 견초 또한 오환과의 경험을 살려 원정에 동참시켰다.
태조가 남피에서 원담을 멸하고 견초를 군모연(軍謀掾)으로 임시로 임명하고 오환을 치는데 종군하게 했다. 유성(柳城)에 도착하고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로 삼았다.
『삼국지』 「견초전」

한편, 장수도 이때 원정에 종군하였으나 도중에 죽었다.
오환(烏丸)을 유성(柳城)에서 정벌하는데 참가하여 이르지 못하고 죽으니, 시호를 정후(定侯)라 하였다.
『삼국지』 「장수전」

3.1. 반대 여론

장료 등 제장들 여럿이 유표가 당시 객장으로 신야에 주둔하던 유비를 앞세워 조조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허를 노리리란 우려를 제기했다.
태조(太祖-조조)가 장차 유성(柳城)을 정벌하려 하자 장료가 간언했다,

“무릇 허(許)현은 천자의 도읍입니다. 천자는 허현에 계시는데 공은 멀리 북쪽을 정벌하시니, 만약 유표가 유비를 보내 허현을 습격하고 이에 근거해 사방에 호령하면 공의 세력이 꺾일 것입니다.”

태조는 “필시 유표가 유비에게 일을 맡기지는 못할 것이다.”이라 하고는, 마침내 북쪽을 정벌했다.
『삼국지』 「장료전」 배주 「부자」

하지만 곽가는 유표가 유비를 불신하기에 함부로 원정하지 못하리라 예측하고 북방 원정을 조언하였다.
장차 북쪽으로 삼군의 오환을 정벌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원상은 도망간 적에 불과하고 이적(夷狄)들은 탐욕스러울 뿐 친애함이 없으니 어찌 원상이 이들을 능히 부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깊이 들어가 정벌하면 유비가 필시 유표를 설득해 허도를 기습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변고가 생기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오직 곽가(郭嘉)만이 유표는 필시 유비를 신임하지 못하리라 헤아려, 공에게 원정하도록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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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무제기」
태조가 장차 원상(袁尙) 및 삼군오환(三郡烏丸)을 치려 하니, 수하들 다수는 유표(劉表)가 유비(劉備)를 시켜 허(許)를 습격하며 태조를 공격할까봐 우려하였다. 곽가가 말했다,

“공이 비록 위엄으로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으나 호(胡)(→북방민족의 통칭. 여기선 오환)는 그들이 멀리 떨어져있는 것을 믿고 있으니 필시 방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방비가 없음을 틈타 갑작스럽게 공격한다면 격파하여 멸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원소(袁紹)가 민이(民夷,중국의 일반백성과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푼데다가 원상 형제가 생존해 있습니다. 4주(四州)(기주, 청주, 병주, 유주)의 백성들은 단지 위엄으로써 강제로 우리에게 귀부한 것이며 은덕과 시혜가 아직 더해지지 못했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유표를 치며 남정(南征)한다면, 원상은 오환(烏丸)이라는 자산을 기반으로 그의 사주지신(死主之臣,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불러 모을 것이고 이와 더불어 호인(胡人)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면 민이(民夷)가 함께 호응할 것이니, 이는 답돈(蹋頓)에게 다른 마음이 생기게 하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의 계책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 청주, 기주가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유표는 좌담객(坐談客,앉아서 담소하기나 좋아하는 인물)일 뿐이라 자신의 재능이 유비를 부리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그를 제어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고 가벼운 임무를 주면 유비가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니 우리가 비록 나라를 비워두고 원정(遠征)하더라도 공이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이에 태조가 실행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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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곽가전」

선주전 및 한진춘추에 의하면, 실제로 유비는 유표에게 허 습격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건안 12년 (207년), 조공이 북쪽으로 오환(烏丸)을 정벌하자 선주는 유표에게 허도를 습격하도록 설득했으나 유표는 이 계책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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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선주전」
조공이 유성(柳城)에서 돌아오자 유표가 유비에게 말했다,

“군(君-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 이런 큰 기회를 놓쳤소.”

유비가 말했다,

“지금 천하가 분열되어 날마다 간과(幹戈-전쟁)가 계속되고 좋은 기회는 또 올 것이니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만약 다음번 기회에 응한다면, 이번의 실기를 애석해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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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춘추」

한편, 사환 등은 장성 너머 북방까지 깊이 들어가는 원정이 무모하다고 여겼으나, 한호는 지금 조조의 기세가 강성하고, 중군 지휘관의 입장에서 사령관의 전략에 반대하면 안 된다는 이유를 들며 원정에 찬성했다.
태조가 유성柳城을 공격하고자 할 때의 일이다. 영군領軍 사환史渙은 멀리 행군하여 깊이 들어가는 것은 완벽한 계책이 아니라고 여겨 한호와 함께 간언하고자 했는데 한호가 말했다, “지금의 병세兵勢가 강성해 위엄이 사해에 떨쳐, 싸우면 이겨 공적을 이루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는 상황인데 지금과 같은 때에 천하의 근심거리를 없애지 않으면 장차 우환이 될 것이오. 게다가 공(=조조)께서 신무(神武-영명하고 위풍당당함)하시어 실책하시는 법이 없으니 내가 군과 더불어 중군주中軍主의 입장으로 반대할 일이 아닙니다.” 마침내 수행하여 유성을 깨뜨렸다. 관직을 고쳐 중호군中護軍으로 삼고 장사, 사마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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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하후돈전」 중 '한호전'

4. 노룡새로 우회하다

207년 가을 7월, 조조가 기존에 이용하기로 계획했던 진군로는 장마로 인한 홍수로 막혔고, 다른 샛길들은 오환군이 장악하고 있어 진격할 수 없었다. 유우의 종사 출신으로 현지 사정에 밝던 전주는 오환 토벌에 곧바로 참여했고, 우회로를 알리는 길잡이가 되었다. 조조는 기존의 길을 지키는 오환군에게 막혀 회군하는 척하다 노룡 샛길을 통해 답돈을 기습할 수 있었다.
여름 5월, 무종(無終-유주 우북평군 무종현)에 이르렀다.

가을 7월, 큰 홍수가 나서 바다에 면한 길(傍海道)이 통하지 않았는데, 전주(田疇)가 향도(鄕導-길 안내자)가 되기를 청하자 공이 이를 따랐다. 군을 이끌고 노룡(盧龍)의 새(塞)를 나오니 새 밖의 길이 끊어져 통하지 않았다.

이에 산을 파고 계곡을 메우며 500여 리를 가서 백단(白檀)을 거치고 평강(平岡)을 지나 선비정(鮮卑庭-선비족의 앞뜰, 영역)을 건너고 동쪽으로 유성(柳城)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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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무제기」
그 당시는 마침 비가 내리는 여름이었는데, 무종은 해안을 따라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도로가 막혀 통하지 않았다. 적은 또 샛길을 차단하여 지키고 있었으므로, 태조의 대군은 나아갈 수 없었다. 태조는 이것을 걱정하다가 전주에게 물으니, 전주가 말했다.

“이 길은 매년 가을과 여름에는 항상 물이 가득합니다. 얕다고 해도 수레와 말이 통과하지 못하고, 깊다고 해도 배가 운행할 수 없으니,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옛날 북평군(北平郡)의 군치(郡治)는 평강(平綱)에 있었고, 길은 노룡(盧龍)에서 나와 유성(柳城)에 이르렀습니다.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연간 이래로 이 길이 무너져 내려 끊어진 지 2백 년이 되었는데, 좁고 작은 지름길이 있어 통행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적은 승상의 대군이 무종에서 나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물러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느슨하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군대를 조용히 철수시키고 노룡의 입구로부터 백단(白檀)의 험난함을 뛰어넘고 텅빈 곳을 나온다면, 길은 가깝고 편리할 것이고, 그들이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 때에 갑자기 덮치면, 답돈(蹋頓)의 우두머리를 싸우지 않고도 잡을 수 있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알겠소.”

곧 군사를 인솔하여 돌아가며 물 옆 길가에 세워져 있는 큰 나무에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은 여름이라 길이 통하지 않으니, 가을을 기다렸다가 다시 진군하리라.”

적군의 척후기병(斥候騎兵)은 그것을 보고 정말로 태조의 대군이 갔다고 생각했다. 태조는 전주에게 그가 원래 갖고 있던 군사들을 인솔하게 하고, 서무산(徐無山)으로 올라가 노룡(盧龍)으로 나와, 평강(平岡)을 지나서 백랑퇴(白狼堆)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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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전주전」

곽가 또한 기습의 이점을 들며 노룡새 우회책을 주장했다.
역(易)(기주 하간국 역현)에 도착하니 곽가가 말했다,

“병(兵)에서는 신속(神速)을 귀하게 여깁니다. 이제 천리 길을 가며 적을 습격하려는데 치중(輜重, 짐수레)이 많으면 이득을 취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치중으로 인해 진군이 늦어져 저들이 우리가 온다는 것을 듣게 되면 필시 방비를 할 것입니다. 치중은 남겨두고 경병(輕兵,가볍고 날랜 차림의 군대)으로 겸도(兼道,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감)하여 출군함으로써 엄기불의(掩其不意, 적이 뜻하지 못할 때에 엄습함)하느니만 못합니다.”

이에 태조가 은밀히 노룡새(盧龍塞)를 나가 선우정(單于庭)으로 곧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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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곽가전」

5. 백랑산 전투

207년 8월, 2백여 리 거리까지 몰래 접근한 조조는 서둘리 북쪽으로 재배치된 오환군과 백랑산에서 조우전을 벌였다. 고지에서 답돈의 진영을 살펴보며 적이 정돈되지 못함을 파악한 조조는 장료, 장합 등을 선봉에 세워 적군을 격파하고, 답돈 등을 죽였다. 원상, 원희 형제는 요동으로 도주했다.
(유성에 도착하기) 2백리 전에 적들이 이를 알아챘다. 원상, 원희는 답돈(蹋頓), 요서 선우 누반(樓班), 우북평 선우 능신저지(能臣抵之) 등과 함께 수만 기를 이끌고 맞섰다.

8월, 백랑산(白狼山)에 올랐다가 졸지에 적과 조우했는데 그 무리들이 매우 많았다. 공의 거중(車重-치중)은 후방에 있고 갑옷을 입은 자는 적으니 좌우가 모두 두려워했다. 공이 높은 곳에 올라 적의 진지가 정돈되지 못한 것을 보고는 이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며 장료(張遼)를 선봉으로 세웠다.

적군이 크게 붕괴되니 답돈과 명왕(名王) 이하를 참수하고, 투항한 호인(胡人), 한인(漢人)이 20여 만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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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무제기」
유성(柳城)으로부터 2백여 리까지 갔을 때, 적군은 비로소 깜짝 놀랐다. 선우(單于)는 스스로 진(陳)에 임했다. 태조는 대군을 인솔하여 그와 접전을 벌였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 또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유성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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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전주전」
건안 11년(206년), 태조가 친히 유성의 답돈을 정벌했다. 잠군(潛軍-은밀히 군을 움직임), 궤도(詭道)하여 백리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적에게 발각되었다. 원상은 답돈과 함께 무리들을 이끌고 범성(凡城)에서 태조군을 맞아 싸웠는데 그 병사와 군마가 매우 많았다. 태조는 고지에 올라 적진을 살펴보며 군이 진격하지 못하게 억누르다, 적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관찰한 후에 적을 공격해 깨뜨리고 적진에 임해 답돈을 참수하니 죽은 자가 들판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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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오환전」
태조를 수행해 유성(柳城)에서 원상을 정벌했다. 갑작스럽게 노(虜-오랑캐 또는 적군)와 조우하자 장료는 태조에게 싸울 것을 권하며 기백을 심히 떨쳤다. 태조가 이를 장하게 여겨 자신이 소지한 대장기를 장료에게 주었다. 마침내 원상을 공격해 대파하고 선우 답돈(蹋頓)을 참(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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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장료전」
태조를 수행해 유성(柳城)을 토벌할 때 장료 등과 함께 군의 선봉이 되었고 공을 세워 평적장군(平狄將軍)으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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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장합전」
북쪽으로 세 군(三郡)을 정벌할 때 조순이 이끌던 기병(또는 조순 부部의 기병)이 선우 답돈(蹋頓)을 포획했다. 앞뒤 공으로 고릉정후(高陵亭侯)에 봉하고 식읍 3백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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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조인전」 중 '조순전'

6. 원정의 결과

조조는 한번의 결전으로 오환에서 반기를 들만한 세력을 일소한 후 유성에서 전진을 멈췄다. 원상, 원희, 속복환 등 도망친 패장들은 요동태수 공손강에게 참수되었다.
요동 선우 속복환(速僕丸)과 요서, 우북평의 여러 호족들은 그 종인(種人-종족)들을 버리고 원상, 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그 무리들이 수천 기에 이르렀다.

당초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공이 오환을 격파하자 어떤 이가 공을 설득하기를, 끝까지 정벌하면 원상 형제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공이 말했다,

“나는 바야흐로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오게 할 것이니 군사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소.”

9월, 공이 군을 이끌고 유성으로부터 돌아오자 공손강이 원상, 원희와 속복환 등을 참수해 수급을 보내왔다.

제장들이 혹 묻기를,

“공이 돌아오자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참수해 수급을 보내왔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고 하자 공이 말했다,

“공손강은 평소 원상 등을 두려워했으므로, 내가 급히 공격하면 서로 힘을 합칠 것이고 느슨하게 하면 서로 도모할 것이니, 형세가 그러했소.”

11월, 역수(易水)에 이르자 대군(代郡) 오환의 행(行-대행의 의미) 선우 보부로(普富盧)와 상군(上郡) 오환의 행 선우 나루(那樓)가 그들의 명왕(名王)을 거느리고 와서 하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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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무제기」
(건안) 12년(207), 태조가 삼군 오환을 정벌하고 유성을 도륙하였다. 원상 등은 요동으로 도주하였으나 공손강은 원상의 머리를 참수하고 (조조에게) 보내었다. 이 이야기는 「무제기」에도 있다. (조조가) 공손강을 양평후로 봉하고 좌장군으로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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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공손도전」
건안 12년(207) 태조가 요서에 이르러 오환을 공격했다. 원상과 원희가 오환과 함께 군대를 돌이켜 싸웠으나 패주하여 요동으로 달아났지만, 공손강(公孫康)이 그를 꾀어 참수하고 그 목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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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원소전」 중 '원상전'
(건안) 12년(207). 조조가 요서를 정벌해 오환을 공격했다. 원상,원희는 오환과 더불어 조조의 군대와 맞섰으나 싸움에 패하여 도망쳤는데, 이에 친병 수천인이 (원상과) 더불어 공손강(公孫康)이 있는 요동(遼東)으로 달아났다. 원상의 사람됨은 기민하고 과감하였으므로 (요동에 도착하기)앞서 원희에게 모략을 말했다.

"이제 요동에 이르면 공손강이 필시 나를 만날 것입니다. 제가 형을 위해 그 자리에서 손수 공손강을 죽인 후 군현을 점거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삼는다면 (이를 기반으로 하여 재기해) 오히려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공손강 역시 원상을 죽여서 공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용한 무사들을 마구간 안에 미리 숨겨두고 그 이후에 원상, 원희를 불러들였다. 들어가기 직전, 원희가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며 나아가지 않으려 하자 원상이 강하게 제지하여 마침내 안으로 들어갔다. 미처 자리에 이르기도 전에 공손강이 소리지르며 복병을 불러들였고 결국 원상,원희는 포획되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땅 위에 꿇어앉혀져 (공손강과) 대질했는데, 원상이 이를 가리키며 공손강에게 말하길.

"아직 죽지 않는 사이의 추위를 참지 못하겠으니 더불어 앉을 자리쯤은 허락해 주셔야겠소."

공손강이 말했다. "경의 머리가 만리 길 여행을 떠날 판에 그런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에 원상,원희를 베고 그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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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원담열전」
원상은 사람됨에 용력(勇力)이 있었기에 공손강의 군대를 탈취하고자 하여 원희와 모의하길

“지금 도착하였기에, 공손강이 반드시 서로 상견하게 되는데, 형과 함께 그를 치면, 요동을 소유하여 오히려 땅을 넓힐 수 있습니다.”

라 했다. 공손강 또한 마음으로 생각하길

“지금 원희와 원상을 취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설명할 방도가 없게 된다.”

고 하였다. 이에 먼저 낭청 중에 정용한 무사들을 배치시켜 두고, 그런 후에 원희, 원상을 청하였다. 원상과 원희가 들어오자 공손강이 복병을 내보내 그들을 모두 결박하고 얼은 못에다 앉혔다. 원상이 추워 앉을 자리를 요구하자, 원희가 말하길

“머리가 이제 만리길을 가게 생겼는데, 자릴 구해서 무엇하겠느냐!”

라 했다. 이에 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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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또한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는 승리 후에 북방 원정의 위험성에 대해 간언한 수하들에게 오히려 포상을 내리며 칭찬했다.
이때 추위가 일찍 찾아왔고 2백리 간에 물이 없었으며 또한 군중에서 먹을 것이 부족해 말 수천 필을 죽여 양식으로 삼았는데, 땅을 30여 장 파서 물을 얻었다. 돌아온 뒤 이전에 (원정하지 말도록) 간언한 자에 관해 물으니, 뭇 사람들이 그 이유를 몰라 모두 두려워했다. 공이 이들 모두에게 후하게 상을 내리며 말했다,

“내가 전에 원정을 행한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란 것이오. 비록 성공했으나 이는 하늘이 도운 것이니 상규로 삼을 수는 없소. 제군이 간언한 것이 만안(萬安-만전)의 계책이었기에 이에 상을 내리니, 이후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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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전」

답돈의 죽음 이후 독립 연맹을 구성할 구심점이 사라진 오환은 조조에게 복속했고, 이후 위나라의 정예 기병전력으로 동원되었다.
속부환(速附丸), 루반(樓班), 오연(烏延) 등은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요동에서 그들을 모두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왔다. 염유가 통솔하던 유주, 병주의 오환 만여 락(落)을 모두 중국으로 옮겨 거주하게 하고 그 후왕(侯王) 대인(大人)의 종중(種衆)을 정벌전에 뒤따르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삼군 오환(三郡烏丸)은 천하의 명기(名騎-이름난 기병)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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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오환전」

이후 더 서쪽에서 216년 경에 대군의 오환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배잠에게 평정되었다.
이때 대군(代郡)이 크게 소란했으므로 배잠을 대군태수로 임명했다.

오환왕(烏丸王)과 그 대인(大人) 세 명은 각자 선우(單于)라고 칭하고, 대군의 정사에 간섭하였다. 전임 태수가 그들을 바르게 다스릴 수 없었으므로, 태조는 배잠에게 정예병을 주어서 그들을 진무하고 토벌하게 하려고 했다.

“대군(代郡)의 호구 수는 많고, 병사와 전쟁용 말은 항상 만여 필을 헤아립니다. 선우는 스스로 방종하게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음을 알고 내심 매우 불안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토벌한다면, 반드시 두려워하며 경내에서 항거할 것이고, 소수의 장수는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응당 계획을 짜서 그들에게 대응해야지, 군대로 위협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레 한 대를 타고 대군으로 갔다. 선우는 놀라며 기뻐했다. 배잠은 그들을 위로하고 진정시켰다. 선우 이하는 모자를 벗고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전후로 하여 약탈했던 부녀자, 기계, 재물을 모두 돌려주었다. 배잠은 군내의 대관중 선우(單于)와 일체가 되었던 자, 학온(郝溫)ㆍ곽단(郭端) 등 10여 명을 주살시켰다. 북쪽 변방은 매우 놀랐고 백성들은 그에게 귀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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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배잠전」

218년 재차 반란한 오환은 조조의 아들 조창전예에게 진압당했다.
23년(218), 대군(代郡)의 오환(烏丸)이 모반을 일으키자, 조창을 북중랑장(北中郎將)으로 임명하고 효기장군을 대행(行驍騎將軍)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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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임성위왕찬전」
언릉후(鄢陵侯) 조창(彰)이 대군(代郡)을 치며 전예를 상(相)으로 삼았다. 군(軍)이 역수(易水) 북쪽에 주둔하자 노(虜)가 기병을 복병으로 두었다가 공격하니 군인들이 요란해져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전예가 지형에 의거하여 수레로 둘러싸 둥근 진을 치고 그 안에서 궁노(弓弩)를 가득 당기고 의병(疑兵)들을 그 틈에 채워두었다. 호(胡)가 진격하지 못하고 흩어져 물러나자 이를 뒤쫓으며 공격해 대파하고 마침내 대(代)를 평정하였으니 이는 모두 전예의 계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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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전예전」

기타 오환족은 위나라와 선비 사이에 끼어 양쪽으로 흡수되며 독립된 민족으로의 정체성을 잃고 동화되었다.[2]

7. 번외

7.1. 노식을 조문하다

건안(建安) 연간 중에 조조(曹操)가 북쪽 유성(柳城)을 토벌할 때 탁군(涿郡)을 지나며, 수령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옛 북중랑장(北中郎將) 노식(盧植)은 이름이 천하에 저명하니, 그 학식으로는 유종(儒宗)이 되었고, 선비들의 모범이요, 나라의 정간(楨幹)이다. 지난날 무왕(武王)이 은(殷)에 들어갔을 때 상용(商容)의 마을을 봉하였고, 정나라가 자산을 상처하게 되었을 때, 공자께서 눈물을 흘렸다. 고(孤)가 이 주에 이르렀으니, 그 남아있는 풍습을 기리고자 한다.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와 어진 이의 후손에게는 마땅히 수례(殊禮)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삼가 승연(丞掾)을 보내어 그의 분묘(墳墓)를 돌보게 하고, 그 자손이 있으니, 함께 약소하게나마 술을 올려 그 덕을 기리고자 한다.”
『후한서』 「노식열전」

7.2. 조조의 보출하문행

조조는 유성 원정을 마치고 귀로에 올라 총 4수의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을 지어 삶을 반추했다. 차례대로 서문인 염(艷), 큰 바다에 뜻을 빗대어 표현한 관창해(觀滄海), 북방의 겨울을 그리는 동십월(冬十月), 하북의 모습을 담은 토불동(土不同), 그리고 노년에 접어들었으나 여전히 웅대한 기개를 드러내는 귀수수(龜雖壽)이다.
구름 떠돌고 비 내리니
구강(九江)의 언덕이 넘쳐 흐르는구나
내 몸 임하여 다른 뜻 살펴보니
마음에 품은 뜻 주저할 따름이요
무얼 따라야 하는지 알 도리 없도다
몸이 갈석(碣石) 땅을 지나니
마음은 슬퍼 동해를 한탄하노라
「보출하문행」 중 「염(艷)」

7.3. 조식의 종군

조식이 228년 석정 전투의 패전 후 조예에게 임용을 청하며 올린 「구자시표」에서, 조조를 따라 현새(玄塞), 즉 만리장성 바깥으로 나갔다고 함은 유성 원정에 종군했다는 것이다.
신은 과거에 무황제를 따라 출정하여 남쪽으로 적안(赤岸)까지 갔었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는 옥문(玉門)을 바라보았고, 북쪽으로는 현새(玄塞)를 나갔으니, 군사를 인솔하고 병사를 쓰는 전술이 매우 신비하고 묘함을 보았습니다.
「구자시표」 중

조식이 쓴 시 중에 대표적으로 알려진 「백마편」은 대개 유성 원정에 종군할 당시 지은 시로 여겨진다.
북방에서 우격(羽檄; 깃털로 표시되어 급보를 알리는 서신)이 도착하니
말을 몰아 방어진에 오른다
깊숙이 쳐들어가 흉노를 밟고
말 돌려 선비를 압도한다
「백마편」 중



[1] De Crispigny, Imperial Warlord, p. 227-230[2] De Crispigny, Northern Frontier, p. 415-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