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朴羲秉1871-1907
2. 생애
강원도 철원 출신이다. 1894년에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해 외아문[1] 주사로 재직 중에 1895년에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게이오기주쿠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했지만 중퇴하였다. 이후에 아관파천으로 일본 유학파들의 입지가 애매해진 상황에서[2] 일본에 체류하다가 의친왕(당시엔 의화군) 이강과 만나게 되었다. 이강도 보빙대사로 왔다가 영친왕이 태어나면서 귀국하지 못했다. 이후 둘이 미국으로 넘어가 로어노크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8년에 박희병은 귀국하여 외부[3] 주사로 복직했다. 평안북도 운산 금광에서 미국인 상대로 교섭과 통역을 담당했다.이 시기에 선천에 신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사로 조카인 박용만을 채용했다.[4]
1905년에 취업 사기로 한국인 노동이민자 1천 명이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아가베 농장에 노예로 팔려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특히 이 문제가 중요했던 건 러일전쟁 후에 1차 군축으로 전역하게 된 장병 2백여명이 이 이민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박희병은 1906년 1월에 멕시코에 도착했지만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후 박희병은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 정착했다. 장현이란 가명을 썼고 재미교포를 상대로 직업소개소와 숙박시설을 운영했다. 조카인 박용만도 같이 일했다. 1907년 6월 13일에 병사했다.
3. 출처
- 이기동 <비극의 군인들> 59-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