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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1년[1] 7월 25일
전라도 보성군 봉덕면 법화리
(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2] 648번지)[3]
사망 1934년 7월 15일 (향년 62세)
전라남도 보성군
본관 진원 박씨[4]
초명 박정현(朴禎鉉)[5]
윤장(潤章)
춘파(春波)
가족 아버지 박중규, 고종사촌동생 안규홍
증손자 박형대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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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독립유공자 안규홍은 고종사촌동생[6], 박형대 전라남도의회 의원은 증손자이다.

2. 생애

1871년 7월 25일 전라도 보성군 봉덕면 법화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 648번지)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만회(晩悔) 박중규(朴重奎, 1837.9.15. ~ 1892.2.23.)[7]와 어머니 신 죽산 안씨(新 竹山 安氏, 1832.1.14. ~ ?)[8]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9] 1896년 겨울 전라남도 보성군 문전면 강각리[10] 천봉산(天鳳山) 대원사(大原寺)에서 《진원박씨족보(珍原朴氏族譜)》를 중간(重刊)할 때, 족보 간행 자금의 출납을 담당하는 임원을 맡았다.[11]

안규홍의 어머니 정씨(鄭氏)는 1882년 배우자 안달환(安達煥, ? ~ 1882)이 죽자 안달환의 매부였던 박중규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살았고, 이 때문에 안규홍 또한 자연스럽게 10살 때부터 이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박제현의 어머니는 안규홍의 고모였기에 박제현과 안규홍은 고종사촌지간이었으나 명분상으로는 박제현이 주인이었다. 그럼에도 박중규가 안규홍이 가족들을 거두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던 1908년 2월 보성군 율어면 고죽리 동소산(桐巢山)에서 안규홍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군수장(軍需將) 겸 운량관(運糧官)이 되어 안규홍 의병진 소속 의병 450여 명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소속대원 20여명과 함께 1908년 2월에 보성군 송곡면 파청리(巴靑里)[12], 1908년 8월에 보성군 봉덕면 부곡리 진산(眞山)마을[13], 1909년 3월에 보성군 복내면 원봉리(圓峰里)[14] 등지에서 각각 일어난 여러 전투에 참여해 승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1909년 7월 일제가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기 위하여 토미이시(富石) 대위가 이끄는 병력을 증원하여 보성군 일대에 주둔했음을 들은 안규홍이 더이상 의병 활동이 어려워졌음을 깨달아 의병진을 해산시키자 고향 마을에 은둔했다. 이후 순천군 병치(竝峙) 부근 양가쟁이 고개에서 일본 제국 육군 기병대에 체포된 뒤 손발을 절단당하여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았다. 1934년 7월 15일에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사망했다.

198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진원박씨족보(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古2518-25-429) 권4 제23장(53페이지)에는 1872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진원 박씨 집성촌이다.#[3] 본 지번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보성 안규홍·박제현 가옥이 위치해 있다.[4] 24세 현(鉉) 진(鎭) 항렬. 아버지 박중규(朴重奎)는 23세 중(重) 항렬.[5] 진원박씨족보(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古2518-25-429) 권4 제23장(53페이지)에는 이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다.[6] #[7] 자는 문화(文華).[8] 안수방(安秀方)의 딸이다. 조부는 참봉을 지낸 안호(安浩)이다.[9] #[10]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강각마을[11] 진원박씨족보(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古2518-25-429) 권말 「임원록(任原錄)」 참조.[12]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예당1리 파청(波靑)마을[13]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귀산리 웃진산(鎭山)마을[14]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복내리 원봉(圓峰)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