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52:22

박명근(독립운동가)

파일:박명근.jpg
성명 박명근(朴命根)
생몰 1909년 3월 2일 ~ 1987년 10월 8일
출생지 경상북도 대구부 덕산동
사망지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추서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명근은 1909년 3월 2일 경상북도 대구부 덕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7년 12월경부터 이듬해인 1928년 9~10월까지 학교 내에서 조직된 일련의 학생비밀결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대구고보의 비밀결사는 신우동맹(新友同盟), 혁우동맹, 적우동맹, 일우당, 우리동맹 등으로 조직이 개편 및 발전되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적우동맹과 일우당의 조직을 주도했는데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학생동맹휴교를 지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7년 12월 27일, 박명근은 혁우동맹에서 제2야체이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당시 혁우동맹은 5개의 야체이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중앙본부 및 야체이카를 합병하여 일대 결사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에 1928년 2월 26일 박명근을 비롯해 윤장혁(尹章赫)ㆍ상무상(尙戊祥)ㆍ장종환(張鍾煥)ㆍ권태호(權泰鎬)ㆍ조은석(趙銀石)ㆍ이봉재(李鳳在) 등이 모여 적우동맹을 조직하고, 서무부ㆍ정치문화부ㆍ조직부ㆍ조사연구부ㆍ출판부ㆍ선전부ㆍ재정부 등으로 부서를 개편하였다.

적우동맹은 1928년 4월 초 대구고보생 퇴학처분에 대해 ‘대구고보 폭압정책 반대동맹’을 결성하여 동맹휴학을 지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같은 달 30일에는 적우동맹을 해체하고 일우당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1928년 11월 6일 동맹휴학에 대한 일제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적우동맹이라는 명칭이 드러나게 되었고, 관련 학생 105명이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에 붙잡혀갔다. 이 과정에서 박명근도 체포되었다.

1929년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고 공소했지만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931년 1월 21일 대구 시내에 배포된 격문 사건으로 다음날인 22일 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 맹원들과 중외일보(中外日報) 대구지국원들이 검거될 때 그도 연루되어 대구경찰서 고등계에 체포되었다. 50여 일간 조사를 받은 그는 1931년 3월 12일 이활(李活)ㆍ채충식(蔡忠植) 등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가 면소 처리되었다. 이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7년 10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박명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