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49:52

박노호

성명 박노호(朴魯灝)
생몰 1912년 4월 17일 ~ 1963년 4월 1일
출생지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청룡리
사망지 전라남도 완도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노호는 1912년 4월 17일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청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완도군 고금면의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중퇴한 후 고향에서 농어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 1933년 이기홍(李基弘)의 지도로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하면서 공산주의에 감화되었고,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전남 지역의 농민, 어민, 노동자와 인텔리를 포함한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사무부, 조직부, 조사부, 구원부의 조직을 갖췄으며, 기관지로서 <농민투쟁(農民鬪爭)>을 발간했다. 박노호는 1933년 9월 2일 이기홍, 황동윤(黃同允) 등과 함께 완도군 고금면 청룡리의 부락사무소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비참함 생활상과 일제와 친일지주의 착취를 풍자한 <혹농민(或農民)>이라는 소인극(素人劇)을 공연해 농민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려 했고, 1933년 10월에 이기홍 등의 동지와 함께 청년반을 조직하고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4년 2월 중순, 전남운동협의회가 일제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미결수 상태로 복역한 뒤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에는 완도군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963년 4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에 박노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