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기팔(基八) |
본관 | 여흥 민씨[1] |
출생 | 1887년 9월 25일 |
황해도 평산도호부 금암방 일리 (현 황해북도 평산군 한포리) | |
사망 | 1942년 10월 26일 |
황해도 평산군 | |
묘소 | 황해남도 봉천군 누천리 석교동 선영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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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민주호는 1887년 9월 25일 황해도 평산도호부 금암방 일리(현 황해북도 평산군 한포리)에서 아버지 민치순(閔致純, 1855 ~ 1919. 3. 13)과 어머니 파평 윤씨(1853 ~ 1899)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작은아버지 민치경(閔致經, 1857 ~ 1883. 3. 7)에 입양되었으며, 평산군 금암면 대촌리(현 황해북도 평산군 한포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했다.그는 1919년 3월 31일 금암면 한포리 장날을 이용하여 박팽봉(朴彭鳳)·장동환(張東煥)·김충숙(金忠淑)·신수산(申壽山)·유차손(劉次孫)·김수영(金洙榮)·민영무(閔泳武)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다. 그는 이날 6백명의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헌병이 출동하여 무력으로 해산하려 하자, 그는 군중과 투석과 몽둥이로 대항했다. 그러나 군중은 헌병대의 무차별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를 낸 채 해산되었다.
이후 체포되어 7월 2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상고하여 보안법의 부당성과 민족자결주의를 들어 무죄임을 역설했다. 그러나 결국 그해 10월 16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평산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2년 10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민주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교위공파 27세 호(鎬)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