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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펠로폰네소스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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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피소드
1412년 ~ 1420년 1화 ~ 12화 펠로폰네소스 원정
1420년 ~ 1421년 13화 ~ 45화 아테네-이피로스 정복 전쟁
1421년 46화 ~ 59화 정변기
1422년 ~ 1423년 60화 ~ 124화 제1차 대오스만 전쟁
1423년 ~ 1428년 125화 ~ 176화 1차 전간기
1428년 ~ 1432년 177화 ~ 225화 세르비아 십자군
1432년 226화 ~ 247화 제2차 대오스만 전쟁
1432년 ~ 1435년 248화 ~ 277화 2차 전간기
1435년 ~ 1436년 278화 ~311화 나폴리 전쟁
1436년 ~ 1438년 311화 ~ 356화 제3차 대오스만 전쟁
1438년 ~ 1445년 357화 ~ 377화 재건기
1446년 ~ 1448년 378화 ~ 407화 맘루크 전쟁
- 408화 ~ 410화그 후
1. 개요2. 유년기3. 아카이아 원정4. 전후처리 및 개혁

1. 개요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의 작중 초반 전개 및 모레아의 코린토스를 비롯한 아카이아 정벌 과정에 대해 다루는 문서. 대략적으로 1412년부터 1420년에 해당하는 시기를 담고 있다.

2. 유년기

30살까지 동정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던 우리의 주인공. 길을 걷다가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너, 연애가 하고 싶댔지?"라는 말에 무심코 동의했더니 미연시 세상으로 갑작스레 전이하게 되었다.

미연시 세상에서 주인공이 플레이할 캐릭터는 다름이아니라 몰락기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의 7살 시절[1]에 해당하는 모습이었고, 미연시 세상을 만끽하고 뭐고 하기 전에 제국을 부흥시키려 몸을 혹사시키게 되었다. 자기 한몸의 스테이터스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빡센 수행은 필수였고, 그 과정에서 미연시에서 있을 법한 연애 관련 이벤트는 죄다 걷어차버리고 하다 보니 '솔로정진'이라는, 모태솔로로 살아간 세월에 비례해 성장 보너스가 주어지는 히든 능력치가 부여된다.

1413년, 제국은 황제 마누일 2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오스만 술탄국의 내전 과정에서 최대한 이득을 얻고, 술탄 메흐메트 1세는 마누일을 아버지로 섬기기로 맹세하는 등 잠시간의 유예가 주어진다. 마누일은 1414년 모레아 전제국을 다스리던 요안니스를 공동황제로 세우고, 대신 주인공을 유사시 후계자 자리를 이어받을 잠정 계승서열 제2위로서 셀림브리아의 친왕으로 앉히려 시도하나 주인공이 모레아에서 가장 핵심적인 영토인 미스트라를 달라 하면서 미스트라의 친왕 테오도로스와 협의를 거쳐 영지를 교환한다. 이 요청은 유일하게 희망을 걸어볼 만했던 모레아로 향해 조용히 힘을 기른다는 계산 하에 의도된 것이었고, 그런 주인공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누일 2세는 제국이 칠 수 있는 마지막 발버둥으로서 고작 700명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카이아 지방을 정리해 모레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나선다.

주인공은 모레아에서 고생하던 도중 마누일 2세가 모레아로 향해 아카이아의 중심도시인 코린토스에 대한 원정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 소식의 뒷면에 숨어있는 원정의 의도를 간파한다. 하지만 원정에 동원할 병력이 너무 적다는 정보 또한 접수하고는 미스트라에서 어떻게든 병력을 추가로 동원해 원정을 지원한다. 정규군의 편성은 어렵고 기껏해야 500명의 용병을 동원 가능했던 주인공에게 베네치아 상인이 접선해오고, 자신의 신용과 재산을 걸고 맹세한다며 비록 500명보단 덜한 300명 정도의 규모에 지나지 않지만 훈련도, 규율, 장비가 모두 우수하고 약탈 등을 하지 않는 고급 용병[2]을 주선해준다.

이 용병계약에 합의한 주인공은 정확히 한 달 만에 용병대를 만나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용병대장이 16세의 소녀인 이바니아였고, 용병대장이 하필 소녀라는 점에 당황하긴 했지만 어쨌든 계약을 체결하면서 이바니아가 주인공 정규 파티에 가입한다. 또한, 계약 과정에서 모레아의 초반 핵심 인재인 법관 아드리아노스가 본격적으로 합류한다.

3. 아카이아 원정

700명의 원정군과 함께 모레아에 도착한 마누일 2세는 주인공이 단 3개월만에 영지의 상황을 크게 개선시켰다는 희소식을 접하고, 이에 다른 황자들과 비교했을 때 주인공의 탁월한 재능을 새삼 깨닫는다. 아버지인 마누일과 만난 주인공은 아카이아 공국 산하의 여러 도시 및 영지들을 확실히 제압하고 행정제도 안으로 편입해 최종적으로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체를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러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마침내 마누일을 설득한 주인공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나이 때문에라도 전장에 서기 힘들다는 이유로 반강제로 미스트라에 남아 원정군의 보급을 맡는다.

마누일 2세의 원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모레아 북부에 잔존하던 일부 분리독립 세력 및 아카이아의 여러 도시들은 제발로 제국의 통치 밑으로 걸어들어갔다. 이런 원정의 순항을 틈타 주인공은 계속해서 마누일 곁에서 종군하고 싶다고 서신을 보냈지만, 이에 황제는 번번히 허락할 수 없다고 답신했고 끝내 1년간의 원정 내내 주인공이 전장에 서는 일은 없었다. 대신 원정 과정에서 이바니아가 이끄는 용병대가 탁월한 전공을 세웠지만, 이에 마누일 2세는 제국군이 지나치게 초라해보인다는 점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지쳐버린 황제는 1415년 3월 미스트라로 귀환했고, 부사령관직에 주인공을 임명하면서 사실상 원정군을 바톤터치하게 된다.

주인공은 복속된 도시들이 보내온 공물들을 팔아 병장기와 군량을 마련하고, 한편으론 이바니아에게 원정 준비 기간동안 원정군의 훈련을 맡겼다. 보급물자가 마련되고 병력이 훈련에 들어가자, 주인공의 주특기가 비로소 빛을 발한다. 각 항구를 통해 수송되는 식량 및 물자를 각지에 꽉꽉 채워놓고, 뛰어난 행정력으로 확보한 자금으로 비전투인력을 고용해 이를 활용할 수 있게 하면서 원정군은 보급 문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1415년 7월 15일 원정이 재개되었다.

주인공은 원정군 중 절반에 달하는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카이아로 출정했고, 섭정으로 아버지인 마누일 2세를 지목해 행정의 공백을 메꿨다. 마누일은 자신의 천부적인 외교적 감각을 이용해 모레아의 문제점인 정쟁들을 순식간에 잠재워나갔고, 미스트라에 대주교좌 설치 떡밥을 미리 깔아놓으면서 주인공과 모레아에 최대한 힘을 실어줄 방법에 몰두한다. 기독교의 주요 기념일이자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플을 라틴 제국에게서 탈환한 8월 15일에 맞춰 주인공은 아카이아를 전면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아카이아의 배후에 있던 베네치아가 움직이려 한다.

주인공은 휘하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코린토스에 도착하고, 이와 동시에 원정 과정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적군을 맞닥뜨린다. 다름이 아니라 이들은 4차 십자군 이후 그리스 각지에 뿌리내린 십자군 국가들의 잔재인 라틴 기사들로, 잘 무장한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랜스 돌격을 방해한다. 전술이 성공해 기사들의 랜스 돌격이 실패한 후 벌어진 난전에서 한 기사와 일기토를 벌이던 그는 낙마하지만, 한 이름없는 기병[3]이 기사를 죽이면서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난전 끝에 라틴 기사들은 1백 명 이상의 피해를 입어 괴멸했고, 이후 여세를 몰아 원정군이 동요하던 적 보병대 600여 명까지 분쇄하면서 압도적인 교환비로 전투가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원정군 또한 부상자의 치료와 무장의 재정비 및 전력 보충이 필요했으며, 따라서 주인공은 코린토스의 완전한 편입을 겸해 얼마간 코린토스에 머물기로 결정한다.

잠시간의 휴식이 끝난 후, 재편된 원정군은 칼란드리차[4]로 향해, 대비를 제대로 안 갖춰놨던 도시를 순식간에 함락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도시를 통치하던 라틴인들은 즉시 추방당하고 그 자리를 제국의 법관들이 대체하는 등 중부 아카이아에서도 제국의 통치권이 부활했지만, 원정군이 기세를 몰아 아카이아의 나머지 땅까지 수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정군이 2주간 휴식을 취하는 동안 비로소 베네치아 원로원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파트라스에 1500명의 병력을 주둔시켰고, 주인공은 3배 이상의 전력차가 나는 상황에서 아카이아의 나머지 땅을 수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 하에 회군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죽다 살아난 아카이아의 잔존 영주들은 전대 친왕 테오도로스와 주인공, 그리고 그 배후의 마누일 2세를 비교하며 두려워했고, 결국 이익 중심으로 움직이는 베네치아가 아카이아와 모레아 사이의 결혼동맹은 어떻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주인공은 파트라스 근교에서 철수하려던 도중 베네치아의 중개인이 아카이아 공작의 영애와의 혼인 동맹을 제안해오고, 이에 주인공은 처음엔 거절하려 했지만 중개인이 영지 상속권을 떡밥으로 뿌리면서 생각이 달라진다. 다만 아직 열 살밖에 안된 자신이 혼인을 할 순 없으니 대신 자신에게 호의를 빚진 바 있는 테오도로스 황자와의 결혼을 중개인 측에게 역으로 제안한다.

1415년 10월 23일 주인공은 비로소 미스트라로 귀환했고, 원정의 대성공을 통해 그는 모레아 내에서 높은 권위를 갖추게 되었다. 이윽고 그는 명목상 제국의 주군인 메흐메트 1세에게 모레아가 수복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줄 것을 간청했고, 이것이 승인되면서 아카이아 대부분이 정식으로 제국 아래에 재편입되었다. 이어서 주인공은 테오도로스에게 아카이아 영애와의 정략결혼을 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전달했고, 이 과정에서 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한 자신의 구상에 대해 밑밥을 깐다. 결국 주인공은 1416년 셋으로 나눠진 모레아 전체를 자신의 통치 하에 두는 데에 성공했고, 원래 셀림브리아/테살로니카/미스트라/모넴바시아/레온타리온 5개 전제국으로 이뤄져있던 제국의 영지들은 마침내 셀림브리아/테살로니카/모레아 3개 전제국으로 재편되었다.

4. 전후처리 및 개혁

펠로폰네소스 반도 대부분이 수복되고 반격의 여력이 서서히 준비돼가면서 제국엔 새로운 활기가 불어넣어졌지만, 이는 부작용 또한 가져왔다. 다름아니라 젊은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의 등장으로, 이들이 실제 역사상 제국과 비슷하게 서방과의 연계를 통해 오스만을 몰아낼 것과 이를 위한 교회 재통합을 주장하면서 제국의 국론은 두 쪽이 났다. 주전파의 중심인 공동황제 요안니스는 아버지인 마누일에게 제국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무의미한 일이었다.

제국 내에선 주전파의 발언권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고, 이와는 별개로 모레아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완전히 뭉쳐 번영하고 있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쇠락으로 인해 떠난 학자들과 수도사들은 주인공이 눈여겨보고 있다가 곧바로 관료로 등용하거나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할 자유를 인정해줬고, 모레아 전체에서 제국의 전성기 시절 자랑거리였던 관료제가 다시금 자리잡으면서 행정력이 확보되었다. 행정력을 토대로 서서히 재정과 인력이 모여갔고 정규군이 조직되면서 주인공의 지위 하에 권위와 군사력이 쌓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그는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도로를 정비 및 신설하고, 오스만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주요 길목마다 요새를 건축하는 등 기반시설 건설에도 신경을 많이 써, 이전의 모레아의 군주들과는 여러 모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기조에 대해 지역 유지를 비롯한 지방 세력들과 특히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탐탁지 않아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반발했고, 이를 주인공은 용병대를 파견해 해소시키는 등 여러 방식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한계를 목격한다. 결국 이 시점부터 주인공은 팔레올로고스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스스로를 모계 성씨인 드라가슈에서 따온 드라가시스라고 자칭하게 되며[5], 이를 통해 반발 세력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면서 비로소 완전히 안정된 치세가 시작됐다.

1418년, 테오도로스와 정략결혼을 한 아카이아 공작의 영애 아델레네 자카리아가 열병으로 숨을 거뒀고, 아델레네의 아카이아 영지는 테오도로스에게 상속된 뒤 주인공에게 양도되었다.[6]이를 통해 모레아는 파트라스를 수복하는 데에 성공했고, 파트라스를 다스리던 라틴인 가톨릭 대주교가 추방되고 나머지 영주들에 대해선 영지와 통치권이 인정되는 대신 제국 법률의 우선과 법관에 대한 치외법권 적용이 선포되면서 단 14살의 나이에 주인공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체를 수복하는 데에 성공한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수복에 이어 주인공은 중앙정부의 통제가 힘들다는 문제점에 대한 개혁에 들어간다. 주인공은 귀족들이 중앙정부에 충성하게 만들기 위해 민회의 재건에 착수하고, 미스트라와 레온타리온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된 민회는 지방자치에 대한 관용의 증거이자 지역 유지들에 대한 통제수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민회의 성과에 따른 감세와 등용 등의 회유수단을 사용하기 위해 비대한 조세제도에 대한 정비 또한 착수되고 한편으론 펠로폰네소스 각지가 오랫동안 라틴인들의 지배를 받아 제국 법률과 제도상 안 맞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점 때문에 법률의 재정비 또한 시행되었으며, 이에 대해 유능한 법관 데미클레오테스가 책임자가 되면서 데미클레오테스가 주인공 파티에 정식으로 합류한다.

혹시 모를 지역 유지들의 반발에 대비하기 위해 용병대를 민회 설립에 대한 호위병력으로 파견한 뒤, 주인공은 펠로폰네소스 수복의 마지막 걸림돌인 베네치아와 협상에 임한다. 베네치아는 모레아의 무역 보호 및 동맹 확보를 꾀하던 주인공과 손을 잡았고, 모레아 측이 메쏘니와 코로니 두 항구에 대한 베네치아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무역독점 권한과 관세 철폐를 허가하는 조건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군사 전문가 5명과 많은 재화 및 이후의 협력 구도를 얻어낸다. 하지만 주인공은 베네치아 원로원을 만족시키기 위해 협상에서 퍼주다시피 한 건에 대해 치를 떨고, 당장에 확보한 군사 전문가들의 지원과 재화를 이용해 최대한 상비병력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1418년 아카이아 전역이 모레아의 통치 하에 들어온 이래 2년의 세월이 지났고, 미스트라와 레온타리온 외에 나우플리온에까지 설치된 민회는 지역 유지들을 회유하는 데에 효과적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다만 모레아의 산업구조상 농업 집중과 농지 규모의 제한은 재정 확충에 한계를 만들었고, 이를 위해 주인공은 모레아의 경제구조 개혁과 해상교역의 활성화를 위한 베네치아 세력의 일소라는 과제를 떠안는다.

한편, 데미클레오테스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새로운 법률 체계는 모든 도시에서 별 저항 없이 흔쾌히 인정받았다. 또한 각지의 라틴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재산과 상속권을 지키기 위해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고 정교회와 그리스인이 우위를 되찾았으며,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 하고 새로운 법률 체계를 한사코 거부하던 소수의 라틴인들은 재산은 재산대로 몰수되고 성난 군중들에 의해 신변까지 위협당하면서 오랫동안 거주하던 도시에서 추방된다.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라틴인들에게 주인공은 그 어떠한 추가적인 보복이나 위해를 가하지 않았고, 이에 라틴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후 베네치아가 알선해준 5명의 군사 전문가들에게서 병력 양성과 관련한 지식을 얻어내던 주인공은 전장의 패러다임 변화와 강력한 보병 전력에 대한 가능성을 얻게 되고, 거기서 예니체리의 모습을 떠올린다. 또한 후스 전쟁에서 활약중인 얀 지슈카에 대해서도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1420년이 되자 아카이아의 병력은 3천 명 이상의 규모로 자라났고, 마침내 중부 그리스에서 이들을 적극적으로 운용할 기회가 오스만 내외의 변고로 인해 찾아오게 되었다.

[1] 1화의 시간적 배경이 1412년이다.[2] 중세 용병들은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거나 하면 고용주의 영토라 해도 털어먹는 일이 잦았다. 이쪽으로 유명했던 게 13~14세기의 노르만 용병대 및 카탈루냐 용병대.[3] 후일 이 기병이 아드리아노스였음이 밝혀진다.[4] 칼란드라로도 불리며, 코린토스와 파트라스를 잇는 도로의 가운데에 위치한 도시. 소설 내에선 칼라브리타나 칼림브리아로 나오는데 실제론 칼란드리차가 맞다.[5] 여담이지만 원 역사의 콘스탄티노스도 팔레올로고스보다 어머니의 성인 드라가시스를 더 좋아 했었다고 한다. 의도한건진 알 수 없지만 세세한 곳에서 고증이 맞춰진 샘.[6] 타이밍이 너무 절묘한 나머지 이를 두고 독자들은 드라가시스가 테오도로스와 짜고 아델레네를 독살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냈고 작가도 테오도로스가 아델레네가 독살 당했다는 증거품을 가지고 있다며 확인사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