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4:22:24

문창유(고려)

1. 개요2. 생애


文昌裕
(? ~ 1285)

1. 개요

고려의 인물.

2. 생애

1277년 7월, 충렬왕이 천효사에 행차하는데 왕을 따라갔다. 충렬왕은 시중의 수가 적다, 왕이 먼저 들어간다며 오가는 길에 제국대장공주에게 구타를 당하는데, 불교 주술로 총애를 받던 정랑 염승익(廉承益)이 '마구니가 두분 사이를 방해하는 것 같다'고 말하며 공주를 제지했다. 이를 지켜본 승지 이습(李槢)은 염승익의 실속없는 말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며 비꼬았고, 문창유는 설공검에게 둘이 결혼한 사이가 아니어도 이렇게 욕보임이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이지저와 함께 사냥에 빠진 왕을 제지했다. 두 사람은 말이 곡식을 짓밟아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다고 말했고, 충렬왕은 두 사람의 말을 따랐다.

1278년 9월, 천문을 맡아보는 일관(日官)인 문창유와 오윤부는 함께 충렬왕에게 불려가 서경에서 이듬해에 피서할 장소를 점쳤다.

1279년 11월 화성을 침범하자 예사롭지 않은 변고임을 느끼고 오윤부와 함게 충렬왕 앞에 나아갔다. 두 사람은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부처를 섬기는 것만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재앙이며, 삼가고 베풂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충렬왕은 대신들과 논의한 뒤 재추어사대의 의견을 모았다. 문창유와 오윤부의 뜻이 받아들여졌는지 이 달에 궁궐에서 공사하던 일꾼들이 풀려나고 성문에서는 행인들에게 술과 과일이 제공됐다.

또 문창유와 오윤부 두 사람은 충렬왕에게 화재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 일이 있었다. 1283년 4월, 하늘에서 갑자기 크기가 한 말인 불처럼 붉은 물체가 나타나 수창궁에 떨어지고, 바람이 불어와 궁궐이 전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왕은 두 사람을 불러 화재가 있을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고, 문창유 등은
天譴章章, 此猶爲小災也.
하늘의 꾸짖음임이 분명하니, 이는 오히려 작은 재앙입니다.
라고 답했다.

관직이 판삼사사에 이르러 은퇴했던 문창유는 1285년 4월 8일 경술일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