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2-27 14:53:35

문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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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성오(聖吾) / 국사(菊史)[2]
본관 남평 문씨[3]
출생 1882년 2월 5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마령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4]
사망 1968년 8월 14일[5]
경상북도 안동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문도석은 1882년 2월 5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마령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에서 아버지 문치규(文致奎)와 어머니 의성 김씨 김진오(金鎭五)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1일 유연성, 유동수, 이강욱(李康郁), 홍명성(洪明聖), 박재식, 유교희, 박진선(朴晋先), 유곡란(柳谷蘭) 등이 주도한 임동면 중평동 편항시장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2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주동자들을 체포하러 온 일본 경찰 2명을 쫓아냈다. 이후 군중과 함께 편항 주재소로 달려가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일본 경찰들이 공포를 발사하자, 그는 분노한 군중과 함께 주재소의 유리창, 책상, 의자를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했다. 또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대검과 소내에 비치되어 있던 장총, 칼, 탄환, 제복 등을 거두어 우물에 던졌다. 이때 2명의 일본 경찰이 신덕리 방향으로 도망치자 이를 추격해 그 중 한 명을 붙잡아 구타했다. 이후 그는 군중과 함께 경찰관의 사택도 습격하여 완전히 파괴했고, 경찰 가족은 모두 피신했다.

3월 21일 오후 5시경, 그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문서류를 파기했고, 자졍 무렵엔 파괴해 버린 주재소의 판자로 모닥불을 피우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출동한 안동경찰서 순사들에게 체포된 그는 19919년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요, 건조물 손괴, 가택 침입, 상해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안동시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8년 8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문도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이후 문제성(文濟聖)으로 개명했다.[2] 남평문씨 인터넷대동보에는 도사(萄史)로 등재되어 있다.[3] 순질공파-참판공-승지공파 31세 석(錫) 제(濟) 항렬.[4] 남평 문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문치무·문우석도 이 마을 출신이다.[5] 남평문씨 인터넷대동보에는 1954년 4월 25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