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04-29 19:38:35

리 신/리그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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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리 신
날짜: CLE 21년 3월 31일

관찰

눈 먼 사람이라 믿기 어려운 자신감을 온몸에서 발산하며, 리 신이 대전당을 가로질러 온다. 시력을 제외한 오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이 과연 약점인지 도리어 장점인지도 궁금할 정도다.

군살 하나 없이 다부진 체형은 수년간 오로지 무술만 연마해 온 무예가답게 우람한 근육 대신 민첩함이 돋보인다. 하지만 작은 몸집을 보완이라도 하듯, 압도적인 존재감에 더해 확고한 신념까지 느껴진다. 문쪽을 향해 거침없이 똑바로 나아간 리 신이 지면을 쿵 구르더니, 반향음을 쫓아 문 위쪽으로 고개를 쳐든다.

그리고는 문에 새겨져 있는 글귀를 간파하고는 나지막이 웃음 짓는다.


회고

등 뒤에서 문이 뒤에서 닫히는 둔탁한 울림만으로도, 리 신의 마음속에 좁은 방 안의 윤곽이 그려졌다. 소리는 매우 낮았고 답답한 대기가 모든 음향을 왜곡시켜 마음으로 파악한 방의 형태는 조금 흐릿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돌 틈 사이로,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히 인간의 내음이 느껴졌다. 격렬한 감정이 배어 있는 향이었으나 리 신은 이 향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마법의 악취 때문에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이제껏 감지해 왔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비전 에너지가 주위 대기에 녹아들어, 회고의 방이 흘러넘칠 듯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초조함이라거나 두려움이라고 잘못 해석해 버릴 것이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와도 같은, 의미심장하고도 가식적인 평온이 느껴졌다. 리 신은 이 방이 현재 하나의 증폭기로서, 마법의 촉매와도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전기처럼, 눈 깜박할 새에 터져 나올 것 같은 마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에서 신선한 솔잎 향이 흘러나왔다. 리 신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불길이 그를 확 에워쌌다.

이 세상 무엇보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온몸에 뻗어 있는 신경으로부터 엄청난 속도로 고통이 전해져 오기 전에, 그는 서둘러 마음을 닫아걸고서 고통의 접근 자체를 거부했다. 이제 치열한 집중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또다시 불길 한가운데 선 것이다.

얄궂게도, 마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녹서스의 아이오니아 점령에 대한 시위를 시작한 지도 어언 5개월이 지났다. 리 신은 생존을 위한 어떠한 눈속임도 없이, 벌써 두 달째 자신의 육신을 연료로 삼아 불타고 있었다. 타 들어가는 고통 속에 온전한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던 그때, 영혼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완전한 자기 소멸 직전에만 드러나는 내면의 진실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넘실대는 화염이 리 신의 마지막 숨을 거두어 가기 바로 직전, 동료 수도승이 아이오니아가 해방됐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불은 속죄를 위한 것이었지?"

리 신은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불꽃처럼 생생한 스승 레지날드 애쉬람의 굵은 목소리를 금세 알아차렸다. 애쉬람은 발로란에서 몇 안 되는, 리 신의 숨겨진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고통은 마음을 씻어주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 줄 뿐이지요."

"이번에는, 많은 사람의 마음이 집중되었네. 녹서스가 아이오니아에 대한 지배를 철회할 정도로 말이지."

"행복하게 마무리된 것이죠."

얼굴 위로 넘실대는 불길 탓에 애쉬람이 자신을 볼 수 있을지 확신은 들지 않았지만, 리 신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아직 자기 자신을 용서하진 못했군."

리 신이 명상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앉자, 불길이 다시 불타올랐다. 어처구니없게도 이제 이곳이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과거는 항상 그대로 남습니다. 어떤 행동으로도 되돌릴 수는 없지요."

이제 그의 혀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몇 번이나 되새겼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왜 리그에 참가하려 하지, 리 신?"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디 설명해 보게."

앉은 자세로 한 손을 가슴팍으로 들어 올리자 불길도 춤추듯 피어올랐다. 그리곤 리 신이 날카롭게 앞쪽으로 팔을 휙 뻗자, 팔을 에워싸고 있던 화염이 흔들리더니 훅 꺼졌다.

"결정적인 일격이 전투를 끝낼 수도 있겠지요."

죽 뻗은 팔을 따라 불길이 다시 기어오르자, 그는 말을 잠시 멈췄다.

"하지만 이 세계의 악은 지속됩니다. 이에 대항하려면 우리는 쉬지 말아야 합니다."

불길이 다시 손까지 닿자, 리 신은 강하게 주먹을 그러 쥐었다. 손에 맺힌 그 기운이 불꽃을 소멸시키더니 애쉬람을 향해 뻗어 왔다. 애쉬람은 반 발자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 불길 속에서 살아남았나?"

"제가 오래전 잃었던 목적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자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란 말인가?"

애쉬람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무언가 우려하는 기색에 리 신은 깜짝 놀랐다. 애쉬람은 무언가 위협을 느끼는 듯했다.

"방향을 찾기 위해 반드시 목적지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물 한 방울이 개천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면 그 여정이 끝나는 것입니까? 증발하여 구름이 되면 그제야 완전해지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다시 그 물방울이 대지로 내려오면 그 임무에 실패한 것입니까?"

리 신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자네가 가려는 방향은 뭔가?"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지만 간과되고 있는 것을 보호하는 것이죠."

땀방울이 리 신의 이마 끝에 맺혔다.

"개천에서 이는 물거품에서, 흘러가는 구름 그림자에서, 차가운 빗방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을요."

때맞춰 준비하듯 펼쳐 놓은 리 신의 손바닥 위로 땀이 한 방울 똑, 떨어졌다.

애쉬람은 그의 대답을 주의 깊게 곱씹어 보았다.

"자네의 저항 운동은 발로란 사람 모두가 행동하도록 움직였지.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네. 이는 한 사람이 가지고 있기엔 너무 엄청난 힘이야. 하지만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의도가 변질되어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그렇다면 누군가가 자신 안의 선을 찾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길 바랍니다."

심판관에게서 좌절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심판관은 약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리 신이 자신을 꿰뚫어 볼까 불편할 뿐이었다.

"속마음을 드러내니 기분이 어떤가?"

이전까지의 그 질문에 담겨 있던 무게감이 박탈된 듯한, 다소 씁쓸하고 공허한 물음이었다.

"저도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침묵이 뒤따랐다.

리 신은 홀로 남겨졌음을 깨달았다. 마법의 기운은 모두 사용되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음울한 피곤함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 전에 심판을 통과한 자들이 남겨 놓은 감정의 흔적이리라. 달콤하지만 씁쓸한 맛이었다.

흐르는 듯 우아한 동작으로, 리 신은 몸을 일으켰다. 옷과 피부는 마치 화염에는 닿은 적도 없는 양 온전했다. 상쾌한 산들바람이 방을 휩쓸며 지나갔고, 리 신은 그 흘러가는 바람 모양이 마치 둥지에 돌아와 똬리를 틀고 앉은 뱀 같다고 느꼈다.

잠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리 신은 자신보다 먼저 그 문을 지나쳐 갔을 챔피언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살짝 고개를 숙여 절했다.

한 번의 삶이 지나갔고, 이제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눈먼 수도승은 리그 오브 레전드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