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9 20:27:38

롱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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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딴 전투
Trận Long Tân
Battle of Long Tan
파일:longtan-1.jpg
기간
1966년 8월 18일
장소
남베트남 프억뚜이성 롱딴
교전 국가 및 세력

[[호주|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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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뉴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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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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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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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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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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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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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지휘관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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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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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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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해리 아서 스미스[1]
응우옌타인홍
병력
D중대 108명
M113 장갑차 7대
오토 멜라라 Mod 54 곡사포 24문
700명(베트남 측 주장)
1,500~2,500명(호주군의 추측)
82mm 박격포 및 무반동총 다수 보유
피해 규모
18명 전사, 24명 부상, 장갑차 2대 일부 손상 호주 측 주장
245명 전사, 350명 부상, 3명 포로

베트남 측 주장
50명 전사, 100명 부상
결과
호주군의 승리. 롱딴 지역 평정에는 실패함.

1. 개요2. 진행3. 결과4. 사상자 수5. 대중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1966년 8월 프억뚜이성[2]의 롱딴 고무 농장에서 벌어진 전투. 롱딴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있었던 플랜테이션 농장이 펼쳐진 마을이었다. 호주군은 제1 호주 특임 부대 소속으로 1개 중대급 병력이었고 수색 정찰 임무 도중에 베트콩을 상대로 치러진 전투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호주군이 치렀던 전투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전투.

2. 진행

파일:longtan-2.jpg
1966년 8월경, 누이닷에 배치된 호주군은 베트콩 275연대, 445대대가 롱딴의 북쪽 방면에서 아군의 포격 범위 밖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감지하였다. 8월 16일과 17일, 베트콩이 기습적으로 박격포 포격을 가하여 호주군 1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당했다. 다음 날 호주군은 이를 처리하기 위하여 발사 지점을 찾기 위해 수색 정찰 임무를 실시하였다.

8월 18일 정찰 초기, 호주군은 베트콩의 박격포 진지 흔적을 찾아냈지만 이미 베트콩들은 철수한 후였다. 그렇게 수색 임무를 속행하던 도중 베트콩이 기습적으로 공격해 오면서 16시경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롱딴의 고무 농장에서 벌어졌다. 공격당한 호주군의 병력은 D중대로 불과 100여 명에 불과하였고 기습해 온 베트콩은 적게 잡아도 700명[3], 많으면 2,500명[4]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가 3면 포위까지 당해 매우 상황이 절망적이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당시 스콜이 퍼부어지며 악천후로 인하여 항공 지원이 불가능했다. 호주군은 이 상황에서 최대한 방어 진지를 구성하고 베트콩의 파상 공세에 맞서야 했다.

원체 정예 군인들만 선발해서 파병된 호주군이었기에 훌륭한 개개인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병력과 화력의 열세가 너무나 명백했기에 중과부적으로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구원 요청 통신을 받은 누이닷 기지의 뉴질랜드군이 포병으로 화력 지원을 실시하여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지속된 전투로 D중대의 탄약은 거의 바닥나기 시작했다.[5]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한 호주군이 진내사격을 요청했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이들이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은 호주군 지휘부는 무리해서라도 지원 작전을 하기로 결정하고 미 항공 세력의 지원 요청을 하고, M113 장갑차와 탄약 보급을 위한 UH-1 헬리콥터를 동원했다.[6]또한 가용한 중대를 모조리 D중대를 지원하도록 작전에 투입시켰다.

누이닷에서 퍼부어지는 포격과 F-4 미 전폭기의 네이팜탄 세례를 맞은 베트콩의 공세 여력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월등한 수적 우위를 배경으로 공세를 지속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연합군의 화력 지원이 퍼부어지자 초조해진 베트콩은 아예 기도비닉을 무시하고 불을 켠 채 기관총을 사격하며 돌격을 시도하였는데 호주군의 필사적인 방어와 화력 지원에 모두 막혀버렸다.

전투가 생각보다 힘겨워지자 베트콩은 추가로 병력을 우회시킨 뒤 남은 1면까지 모두 포위해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화력 지원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에 처해 있던 D중대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할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이때 즈음 B중대 지원 부대와 장갑차 7대의 지원이 도착하여 베트콩의 측방을 치기 시작했다.[7] 이 장갑차 부대의 등장은 전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베트콩은 장갑차 부대와의 교전으로 공세 역량이 파괴되는 와중에도 근성 있게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장갑차들은 아예 원형 방어진을 구성하고 공격해 오는 베트콩들을 죄다 박살 냈다. 베트콩은 더 이상 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19시 10분의 반격 시도를 마지막으로 공세를 중단하고 후퇴하였다.

전투가 종료된 후 호주군은 계속 경계 태세를 유지하다가 22시경부터야 전장 정리를 시작하고 철수하였다.

3. 결과

호주군 D중대는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로 진지나 참호도 없이 압도적인 베트콩의 공세에 맞서 수 시간이나 버텨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참전 호주군의 교전 기록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당시 참전 용사들은 정기적으로 롱딴 전투 기념식을 치르고 있다.[8][9]

간혹 화력 지원 있는 대로 다 퍼부었으니 당연히 방어 성공한 것이라고 폄하하는 의견도 있다. 물론 화력 지원과 장갑차의 증원이 없었다면 호주군은 분명히 전멸했을 것이나 애초에 박격포 전력을 잔뜩 갖춘 7~25배나 되는 적을 상대로 100명 남짓한 보병 중대가 제대로 된 진지나 참호도 없이 화력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낸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10]

당시 호주군의 기록에 의하면 베트콩이 녹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말이 있다. 전투 내내 베트콩이 민병대답지 않게 포격/폭격 및 적 장갑차 등장 후에도 전의를 상실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근성을 보였던 것도 그렇고 이 전투의 북베트남 측 병력이 명목만 베트콩이고 실제로는 북베트남 정규군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4. 사상자 수

베트남 전쟁이 항상 그렇듯이 양측의 손실 및 전과 기록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 호주 측의 손실 기록은 전사자 18명, 부상자 24명, 장갑차 2대 손상이며 베트콩을 상대로 올린 전과 기록은 베트콩 245명 사살, 350명 부상, 3명 포로 획득이다.
    • 일단 호주군이 직접 베트콩의 시신을 확인한 것은 약 50명가량이며 노획한 베트콩의 무기는 50정가량.[11]
    • 베트콩 275연대는 불과 일주일 후 남베트남군 18사단 공격에 투입되었고 445대대는 미군 제 11기갑기병연대와 대치하는 지역에 대놓고 재배치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베트콩의 손실은 호주군 주장만큼 크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호주군 주장대로 사상자가 600명이면 이미 연대 차원에서도 전투력 복원 및 재편성이 필요해 더 이상의 작전이 불가능한 손실인데, 이 전투 직후에도 잘만 작전에 투입됐다는 것.
  • 베트남 측의 기록은 이와는 매우 달라서 손실은 전사자 47명, 부상자 100명. 호주군을 상대로 올린 전과 기록은 호주군 500명 사상, 장갑차 21대 격파이다.
    • 호주군에게 500명의 사상자를 강요했다는 말은 신빙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짜빈동 전투에서도 그랬지만 애초에 당시 호주군은 D중대 외 증파된 증원군 다 합쳐도 500명이 안 된다. 그리고 누이 닷 기지에 배치된 장갑차의 숫자는 12대였는데, 9대가 어디서 나온 건지 알 길이 없다.
    • 어쨌든 베트남은 호주군이 결과적으로 롱딴 지역의 평정을 포기하고 철수하였고, 베트콩이 일대를 장악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략적 승리라 주장하고 있다.[12]

5. 대중 매체에서



[1] D중대장 소령[2] 현재의 바리어붕따우성[3] 베트남의 주장.[4] 호주군의 주장[5] 당시 호주군 소총수의 주무장은 SLR소총과 탄약 60발분에 불과했다.[6] 헬기 담당은 육군 항공대가 아니라, 특이하게 공군이 맡는다. 영국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7] 베트콩이 대전차 화기와 대전차조를 조직하고 있었으나 전투 내내 내리던 폭우 탓에 장갑차가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8] 이 기념식은 호주군 참전 용사 외에도 당시 참전했던 베트콩 측 참전 용사까지 초청하곤 했다.[9] 그런데 롱딴 전투 50주년 기념이던 2016년에 참전 용사들이 기념식을 대규모로 치르기로 한 것을 베트남 정부에서 태클을 건 적이 있다.[10] D중대가 증원군 도착 직전까지 입은 손실을 보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거의 전멸 판정이 떨어질 정도의 손실이었다.[11] 출처가 불명확하나 북베트남 측의 장군 증언으로는 당시 150명가량이 전사했다는 말이 있다.[12] 다만 베트남전 당시의 북베트남 측 전과 기록은 과장이 매우 심하다는 게 중론이다. 21세기 기준 각종 사료에 따라 교차 검증이 되는 미군 및 연합국 피해에 비해 북베트남 측의 자료가 굉장히 부실한 것도 한몫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