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olbgcolor=#000000><colcolor=#00A3E0> FanDuel Sports Network Florida | |
로드릭 버넷 앨런 Rodrick Bernet Allen | |
생년월일 | 1959년 10월 5일 ([age(1959-10-05)]세) |
국적 | |
출신지 |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77년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 6라운드 (CWS) |
소속팀 | 시애틀 매리너스 (1983)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8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88)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9~1991) |
1. 개요
미국의 외야수 출신 방송인. 무엇보다 후술할 중계 파트너와 크게 싸워서 이미지를 깎아먹은 전력으로도 유명하다.2. 선수 경력
1977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지명을 받았다. 5년간 마이너리그에 머물다가 1982 시즌 후 방출되었고, 이듬해 시애틀 매리너스 유니폼을 입으면서 빅리그에 데뷔했으나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한 채 1984년 시즌을 앞두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주로 커크 깁슨의 백업 멤버로 지명타자와 외야수로 뛰었다.[1] 하지만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마이너리그에 머물렀고, 1988년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팀을 옮겨 1년을 뛰다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2년을 뛰고 선수생활을 마무리 했다.[2]3. 은퇴 후
은퇴 후 마이애미 말린스 창단 멤버로 활약했고, 말린스 산하 더블A팀과 싱글A팀 타격 코치를 지내면서 유망한 타자들을 발굴해나갔다.[3] 1998년 시즌을 마치고 방송계로 데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팀의 지역방송[4] 전력 분석가로 일했고, 2001년부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지역방송[5]의 해설가로 데뷔하여 순탄한 경력을 이어나가는가 싶었다. 그러나...3.1.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다툼
2018년 9월 4일(현지시간),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 중계를 마친 후 그의 파트너였던 마리오 임펨바와 설전이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구단 집기를 서로에게 집어던지는 등 큰 싸움이 벌어졌다.[6][7] 이 사실을 안 화이트삭스 구단은 타이거스 구단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지역방송 사장까지 나서서 해고를 지시했다고 한다.[8][9] 그렇게 방송 커리어가 그렇게 끝나나 했는데, 반전이 찾아왔다.[10]3.2. 마이애미 말린스의 부름
2022년 6월 10일, 마이애미 말린스의 지역방송 채널인 FanDuel Sports Network Florida에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고 4년간 자숙하고 있었던 앨런은 계약서를 받아들고 눈물을 흘리며 서명했다고 한다.[11] 그렇게 4년 만에 방송가로 돌아와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원정 3연전 경기부터 전파를 타게 되었다.[12] 현재는 해설도 하면서 프리게임 & 포스트게임 쇼 호스트 고정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1] 하지만 포스트시즌 라인업에 들지 못했다.[2] 1990년 시즌에 4연타석 홈런이라는 진기록까지 달성했다.[3] 이 중 1997년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 중 한 명인 에드가 렌테리아, 제프 코나인, 크레이그 카운셀이 있다.[4] 현재의 Bally Sports Arizona를 지나 Arizona Diamondbacks TV로 개칭되었다.[5] FanDuel Sports Network Detroit[6] 타이거스가 실책에 실책, 졸전을 펼치자 팀 선수들에게 비아냥대는 듯한 말을 서슴없이 했다. 미시건 주 토박이인 임펨바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던 모양.[7] 당시 구장 물건들은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관리하고 있었다. 당연한거 아냐?[8] 방송 중계용 의자와 마이크 폰, 모니터 등을 망가뜨렸다. 참 많이도 해먹었다[9] 잊지 말자. 타이거스와 화이트삭스는 은근히 피튀기는 라이벌이다.[10] 파트너였던 마리오 임펨바는 보스턴 레드삭스 라디오 중계로 1년을 했다가 계약 만료로 방송국을 떠났다. 지금은 팟캐스트를 하면서 간간히 활동하는 중.[11] 말린스와 접점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상술했듯 1993년부터 1997년까지 말린스의 색깔이라 할 수 있는 소총타선을 키워낸 타격코치로 익히 알려졌기 때문.[12] 지난 20여년 간 해설가로 뛰었던 된 토미 허튼이 올해 76세의 고령 반열에 들었던터라 참여가 제한적이었던 부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