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06:28

레나테 홍


1. 개요2. 상세3. 그 외

1. 개요

레나테 홍(Renate Hong, 1937년 7월 27일 ~ )은 북한 국적의 남편을 둔 독일민주공화국 출신의 독일인이다. 북한 당국이 예외적으로 자국민과 외국인의 이산가족 상봉을 허용한 첫 외국인이며, 2000년대 대한민국에서도 제법 알려졌던 인물이기도 하다.

2. 상세



레나테 홍은 동독 출신으로 1937년에 태어났다.[1] 1955년 동독 예나시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에서 북한에서 유학을 온 홍옥근(1934~2012)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결혼하기 직전 그녀의 이름은 레나테 클라이넬레(Renate Kleinele)였으며, 1955년 가을 신학기 개강과 동시에 예나 대학에서 처음으로 만났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인 홍옥근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북한 정부에 의해 제3차 동독 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며, 10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대륙을 가로지는 십수 일동안의 기차여행을 거쳐 1954년 9월 동독의 라이프치히 시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2]

홍옥근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운 뒤 1955년 9월 예나로 옮겼으며, 이 곳에서 그는 1960년 3월까지 화학을 공부해 석사 과정 학업을 마쳤다. 구 동독 외무부 자료에 의하면 1957년 말 현재 동독 전역에 350명의 조선(북한) 유학생이 있었다고 한다.[3] 무튼 9월 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홍옥근은 이미 첫 강의에서 같은 화학과의 동료 새내기 레나테를 만났으며, 9월 중순 쯤 홍옥근이 레나테의 마음을 갖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동독에서 보기 힘든 아시아 남자, 독일 여자 커플이었던 것이다.[4]

이후 그들은 5년 간의 연애 끝에 1960년 4월 20일 결혼했으며, 10월에 첫 아이를 가졌다.[5] 이들의 혼인 후의 생활은 괜찮아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진짜 불행은 1년 뒤인 1961년에 시작됐다. 1961년 4월 15일 홍옥근은 졸업 후 실습생활을 하고 있던 비텐베르크시에서 급히 예나로 내려왔는데, 북한으로의 송환된 것이었다. 1961년 이른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전 동독 사람들 중에 이른바 자유를 찾는다는 명분하에 서독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생겼는데[6], 서독으로의 망명을 시도한 사람들 중에는 북한 유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레나테 홍은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로 남편 홍옥근과 원하지 않는 이별을 해야 했다. 홍옥근이 동독에서 북한으로 떠날 당시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홍옥근 또한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북한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당시 레나테가 임신한 상태여서 2주나 걸리는 기차 여행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홍옥근은 혼자서 동독을 떠나 북한으로 가게 됐다. 북한으로 돌아온 홍옥근은 함흥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당시 그의 주소는 '함흥시 본궁구역 이동 2.8 비날론 합성직장 서구 합숙'이었다. 함흥의 홍옥근과 예나의 레나테 부부는 1961년 4월부터 1963년 2월까지 편지를 통해 거듭 사랑을 확인하고 가정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했지만, 결국 북한으로 입국하려는 레나테 홍의 시도는 좌절됐다.[7]

레나테 홍은 결국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며 동독에서 살았고, 예나 대학교에서 화학공부를 5년간 했던 그녀는 화학교사 자격을 얻어 8년간 예나 지역 중학교에서 화학 교사로 근무했다. 그 이후 성대에 이상이 생겨 70년부터 통일이 될 때까지 예나에 있는 제약회사의 인사 부서에서 일을 했으며, 행히 동독 정부의 정책 덕분에 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8] 그렇게 해서 그 제약회사에서 독일이 통일된 이후인 1993년까지 직장생활을 했다.

그녀의 사연이 한국에 소개가 된 것은 2006년 한국의 오마이뉴스중앙일보를 통해서였다. 2007년엔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던 반기문 또한 이 사연에 대해 알고 있음을 밝혔고, 그해 5월 레나테 홍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나게 되면서 가족 상봉 문제가 언론의 주목을 다시 받았다. 2달 뒤인 7월 44년 만에 그녀는 북한의 남편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다. 2008년 6월 조선적십자회가 레나테 홍과 두 아들 페터, 우베 홍을 평양으로 초청하였고, 그녀는 47년 만에 남편 홍옥근과 재회할 수 있었다. 재회는 매우 짧았고, 두 아들은 이복 여동생을 만나기도 했다.

그로부터 4년 뒤 남편인 홍옥근은 사망했고, 그녀와 두 아들은 다시 북한에 가서 묘소를 방문했다. 4년 만에 방북을 한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3. 그 외

그녀의 이야기가 조명된 이후 북한에 남편을 둔 여성들의 이야기가 국내 언론에 보도 되기도 했다.

MBC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뤄진 적이 있다.#

레나테 홍은 2014년 아산정책연구원과 인터뷰를 나눈 적이 있다. 이때는 남편 관련한 이야기에 대해 인터뷰를 했지만, 독일 통일 이후 여성들이 실업자가 된 것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었다.#

[1] 이후 그녀는 2014년 아산정책연구원과의 인터뷰에서 제2차 세계 대전도 겪었고, 전쟁이 끝났을 때 학생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종전 이후 독일이 동과 서로 분단이 되고 나서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 서독 지역을 방문하며 친척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2] 북한과 함께 사회주의 진영에 있었던 동독의 경우 국제연대 표명을 넘어서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기간인 1952년에서 1953년 시기에 이미 북한 쪽 유학생들을 받았다.[3] 참고로 당시 동독에 수용된 북한 고아의 숫자는 대략 600명 정도다.[4] 사회주의 국가들 특성상 법적 제도적인 인종주의를 철폐했지만, 인종주의 자체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2006년 오마이 뉴스 기사에 따르면, 레나테 커플 또한 외국인 적대행위를 공공장소에서 심심치 않게 겪었다고 한다.# 레나테의 부모도 둘의 연애를 안 좋아했지만, 홍옥근의 사교성과 됨됨이가 어느 정도 이런 문제를 중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 또한 비슷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진 이리나 말렌코 또한 소련 시절 자신이 겪은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이리나 말렌코에 따르면 "어려서 학교 다닐 때 남자친구가 이디오피아 출신이었는데 이 친구랑 길거리를 다니면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 레나테 커플도 이러한 것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5] 아이의 이름은 홍현철이었고, 독일 이름은 페터 홍이다.[6] 1950년부터 1989년까지 서독으로 넘어온 동독 이탈 주민은 무려 456만 6,300명에 달한다. 당시 동독 인구가 1,700만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숫자다. 물론 동독이 서독보다 출산율이 높아 1980년에 이르러 역대 최고의 합계 출산율인 1.94명을 보이기는 했지만, 인구가 크게 증가하지는 못했다.[7] 동독 시절 한국학(조선학)을 전공하고 김일성의 독일어 통역을 맡았던 헬가 피트 교수의 경우 한국 다큐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동독서 유학하던 북한 유학생들의 귀국과 그들을 따라간 동독 여성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유학생들이 갑작스레 귀국했던 것은 동독 정부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오히려 동독은 그들이 모두 학위를 마치기를 원했다. 당시 그들의 급소환은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 사이의 갈등도 있었는데, 그 시기 동독의 정치 상황은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고, 이에 따라 북한은 그 분쟁에서 어느 편에도 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헬가 피트 교수의 주장이다. 또한 동독 외무성의 경우 레나테 홍과 같은 북한-동독 커플들에게 독일 여성은 북한으로 따라가서는 안된다고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동독 외무성이 보기엔 동독 여성들이 북한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 여성들 중 12명은 막무가내로 남편을 따라 북한에 들어갔다.[8] 당시 동독의 육아 및 보육정책은 서독보다 좋았다. 동독의 사회서비스 중 보육의 사회화 정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자세한 건 이 논문을 읽어보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