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디에고 브로체로 데 라 파스 이 아나야 Diego Brochero de la Paz y Anaya | |
| 성명 | 디에고 브로체로 Diego Brochero de la Paz y Anaya |
| 출생 | 미상 |
| 스페인 제국 | |
| 사망 | 1625년 7월 30일 |
| 스페인 제국 마드리드 | |
| 직위 | 스페인 해군 제독. |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제독. 위그노 전쟁, 영국-스페인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다.2. 행적
디에고 브로체로에 대한 행적은 1570년 몰타 갤리선에서 활동했을 때부터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튀르크 해직 울루크 알리와의 전투에 참전했다가 그가 탑승한 산타 아나호가 나포된 뒤 생포되어 튀르크 갤리선 노예로서 노를 젓는 형을 선고받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몸값을 내주고 풀려났다. 그 후 몰타 기사단장의 도움을 받아 사략선을 건조한 뒤 사략선 해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여러 차례 항해하며 테살로니키만에서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나중에 잍라리아로 돌아온 뒤 나폴리와 시칠리아 방면 스페인 함대에 입대했다.위그노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프로방스에서 프랑스 가톨릭 동맹을 지원했고, 후안 델 아길라의 함대에 합류해 브르타뉴로 파견되어 가톨릭 동맹을 도우라는 군령을 받았다. 그는 실라자르 강어귀에 있는 라로셀에서 적 사략선 2척을 나포했고, 또 다른 전투에서는 잉글랜드 상선 3척을 나포했다. 이후 모를레에 상륙한 뒤 병사 200명을 남겨둬서 주변 지역에 약탈 임무를 수행하게 했으며, 기술공들을 데려와서 브레스트에 새로운 항구를 설계하고 준비하게 했다.
이후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투입되어 적 수송선 24척을 공격하여 7척을 나포하는 성과를 거뒀으며, 1596년 하워드의 카디스 습격 당시 타구스 강 하구를 18척으로 지켜서 적군의 상륙을 막아냈지만, 잉글랜드 해군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카디스를 약탈하는 걸 막지는 못했다. 이후 카디스가 약탈당한 것에 분노한 펠리페 2세의 특명으로 스페인 대함대의 2차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했지만, 피니스테레곶 앞바다에서 폭풍이 발생해 큰 피해를 보고 라코루냐로 후퇴했다. 1597년 왕의 독촉으로 세 번째 원정을 감행했지만, 이번에도 폭풍에 휘말려 실패했다.
1600년 함선 15척을 이끌고 아소르스 제도에서 인도 함대를 보호하는 임무를 2번 수행해, 잉글랜드 함선들이 눈앞에서 그들을 스페인으로 다가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1601년 국왕 펠리페 3세으로부터 후안 델 아길라와 함께 상당한 양의 무기와 탄약을 갖춘 함대에 병사 6,000명을 갖추고 아일랜드로 진군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진을 준비했다. 스페인 함대는 애초 1601년 8월 말에 출항할 예정이었지만, 역풍이 부는 바람에 며칠을 흘려보내야 했고, 9월 2일에 마침내 리스본을 출항하여 아일랜드로 향했다.
며칠간 지연되면서 스페인 선박의 상태는 좋지 않았고, 많은 병사와 선원들이 절반의 식량만 지녔다. 그럼에도 함대는 순조롭게 전진했고, 악명 높은 위험 수역인 비스케이만의 수역을 안전하게 통과했다. 이윽고 함대가 위상 섬에 접근하자, 디에고 브로체로 제독은 어느 곳에 상륙할지를 놓고 산 안드레스 호에서 회의를 열었다. 사령관들은 어디에 상륙할지에 대해 우유부단하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아길라는 도네갈 만이나 잉글랜드를 마주한 아일랜드 동부 해안 항구를 선호했지만, 브로체로는 스페인 원군과 합류하는 걸 순조롭게 하려고 아일랜드 남서부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 당국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원정군에 합류했던 마테오 데 오비에도를 비롯한 사제들은 잉글랜드 왕국이 아일랜드 내에 실질적으로 확보한 영토 중 하나인 먼스터에 상륙하여 공략하고 싶어 했다.
장시간의 논의 끝에, 스페인 함대는 킨세일을 우선 상륙 목표로 삼고, 킨세일의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진 캐슬헤븐 항구를 2차 목표로 지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직후 강한 돌풍이 불면서 함대를 흩어지게 했다. 산안드레스 호에 동승한 디에고 브로체로와 아길라는 1,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코크-킨세일 지역으로 가려고 북동풍과 맞서 항해했다. 폭풍이 지나간 후, 디에고 브로체로는 9월 18일 비교적 좋은 날씨에 남아일랜드에 도착했고, 대부분의 선박이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코크 항구에 입항하려 했지만, 바람이 바뀌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9월 19일, 브로체로의 배들이 킨세일 항구에 도착했다. 군대와 식량이 상륙하자마자 그의 함대는 항구에 8일간 머문 후 출항했다. 스페인 상선 중 몇 척만 항구에 남았다. 며칠 후, 브로체로는 증원군을 실은 여러 척의 배를 타고 도착했다. 그들의 도착으로 아길라의 병력은 약 3,400명으로 두 배로 늘어났고, 대포를 몇 문 더 확보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이 압도적인 군세를 앞세워 스페인군이 상륙한 킨세일을 포위하고, 그들을 구하려던 아일랜드 반군마저 패배하자, 그는 잉글랜드 지휘관인 마운트조이 남작 찰스 블런트와 협상한 끝에, 1601년 1월 아일랜드에서 철수하는 대가로 모든 짐과 깃발을 챙기고 자유롭게 떠나는 걸 허락받았다. 이후 스페인군을 호위해 본국으로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했다.
1606년 펠리페 3세의 지시로 전쟁 회의에 소환된 그는 국왕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해군 현황에 대한 평가를 제시하며, 선원들에 대한 학대, 무시, 경멸, 함선의 결함 있는 무장, 그리고 끊임없는 급여 체납 속에서 자행된 수많은 부패 행위, 특히 식량, 삭구, 탄약의 횡령을 지적했다. 이에 왕은 그를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제독으로 선임하도록 했다. 그는 제독으로서 가장 먼저 선원들과 협력해 대서양과 인도 함대를 위한 조례를 초안하고 시행했다. 1606년 1월 4일 벤토실라에서 반포된 이 조례의 한 조항에는 "외국인에게 의존할 필요 없이 스페인 선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보상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가?"라는 문구가 있었다. 1607년 1월 22일자 법령에 따라, 스페인 선원들은 허가된 무기와 의류, 칼라, 가죽조끼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집을 비운 동안 숙박이 면제되었으며, 전속 관할권과 다양한 특권이 다음과 같이 신중하게 고려되었다.
귀족인 자들이 군주에게 봉사하기 위해 정착하거나 해군과 함대에서 선원으로 또는 해당 선원들이 보통 배에서 맡는 다른 직책으로 지금이나 세상의 어느 때나 군주에게 봉사한 적이 있는 것이 그들의 귀족이나 자녀, 후계자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인격에 대한 더 깊고 더 큰 존경의 표시가 되어야 한다.
브로첸로는 1614년 42개 보병 중대를 태운 미겔 데 비다사발의 기함을 타고 함대를 이끌고 플란데런으로 항해를 떠났다. 바다를 항해하는 해적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는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와의 평화 협정을 이용하여 스페인과 영국 사이에 협정을 중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협정에는 양국이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해적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 함선 20척을 파견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양국의 장군들은 서로 지원할 의무가 있었다. 영국 함선은 자국 영해에서 스페인 함선에 총격과 음악으로 경례하고, 스페인 함선은 자국 영해에서 영국 함선에 똑같이 경례했다. 획득한 전리품은 두 함대가 동등하게 분배하기로 했다.
1621년 3월 31일, 펠리페 3세가 서거했고, 새 군주 펠리페 4세는 올리바레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을 총신으로 감아 절대 권력을 부여했다. 올리바레스 백작은 자신의 집에서 국정 회의를 종종 소집했는데, 이 회의에는 전쟁 위원회에서 디에고 브로체로와 페르난도 데 히론, 재무 위원회에서 후안 데 페드로소와 미겔 데 스피나레타, 그리고 비서인 마르틴 데 아로스테기가 참여했다. 이들은 국왕의 서명을 받기 위해 제출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형식 절차 없이 국왕의 칙령을 선포하거나 결정할 권한을 가졌다. 이 회의는 해상 문제와 무적함대와 함대 증강, 그리고 그 밖의 문제에 관한 사항을 다루었다. 1625년 7월 30일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그는 수많은 편지, 회고록, 그리고 메모를 남겼는데, 그중에는 "리스본에서 됭케르크까지 스페인 무적함대의 왕복 항해 기록"이 있다.